항목 ID | GC087006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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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薛萬鎭 |
영어공식명칭 | Seol Man-jin |
이칭/별칭 | 설인길(薛仁吉)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지영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7월 27일 - 설만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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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3일 - 설만진 밀양 3·13 만세운동에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4일 - 설만진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징역 4개월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33년 11월 26일 - 설만진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8년 8월 15일 - 설만진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내일동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
활동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묘소 | 밀양독립운동기념관 - 경상남도 밀양시 밀양대공원로 100[교동 480]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가계]
설만진(薛萬鎭)[1894~1933]의 본관은 순창(淳昌)이며, 일명 설인길(薛仁吉)이라고도 하였다. 1894년 7월 27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서 아버지 설경직(薛敬直)와 어머니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설만진은 1919년 3월 13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3일의 시위는 고종 인산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3월 1일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던 윤세주(尹世胄), 윤치형(尹致衡) 등이 계획한 것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윤세주 등은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인 전홍표(全鴻杓)를 만나 자문을 구한 뒤 본격적인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윤세주는 3월 11일과 12일 밀양면 내일동(內一洞)·내이동(內二洞) 등지를 돌며 참여자를 모집하였고, 윤치형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 수십 개를 만들었다. 설만진은 당시 내일동에서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었는데, 3월 12일 내이동 정동찬(鄭銅燦)의 집에 갔다가 정동준(丁銅俊), 권재호(權在好), 박소종(朴小宗) 등과 함께 윤세주의 권유를 받고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3월 13일은 밀양면 읍내 장날로, 정오 무렵 장터에는 1,0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오후 1시경 윤세주 등이 조선 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시작하자 군중들도 이에 호응하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설만진도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외치며 장터 곳곳을 행진하였다. 밀양면의 경찰, 헌병뿐만 아니라 부산에서 급파된 헌병, 수비대까지 합세하여 시위대를 무력으로 탄압하였고, 시위대는 결국 해산하였다.
설만진은 3월 13일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4월형을 언도받았다. 부산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8월 14일 출옥하였다. 설만진은 1933년 11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묘소]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밀양독립운동기념관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상훈과 추모]
2008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