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7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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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鍾貫 |
영어공식명칭 | Choi Jong-gwan |
이칭/별칭 | 최종관(崔鍾寬)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지영 |
출생 시기/일시 | 1899년 5월 6일 - 최종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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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3일 - 최종관 밀양 3·13 만세운동 참가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4일 - 최종관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징역 6월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77년 12월 25일 - 최종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3년 - 최종관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내이동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
활동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최종관(崔鍾貫)[1899~1977]은 최종관(崔鍾寬)이라고도 불렸다. 1899년 5월 6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윤세주(尹世胄), 윤치형(尹致衡)은 고종 인산 참석차 서울에 갔다가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윤세주 등은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인 전홍표(全鴻杓)를 찾아가 서울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전하며 밀양에서도 시위를 벌이기로 논의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윤세주는 3월 11~12일경 밀양면 내이동(內二洞) 등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하였다. 12일에는 정동찬(丁銅燦)의 집에서 최종관을 비롯하여 박만수(朴萬守), 박소종(朴小宗), 윤보은(尹輔殷) 등을 만났는데, 오는 13일 성내(城內) 장날에 장터에서 조선 독립을 외칠 것을 제안하였다. 최종관 등은 윤세주의 뜻에 동의하였고, 시위의 실행과 관련된 연판첩(連判帖)에 압인(押印)하였다. 한편 윤치형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 수십 개를 만들었다.
3월 13일은 밀양면 읍내 장날로, 정오 무렵 장터에는 1,0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오후 1시경 내일동(內一洞) 김병환(金鉼煥) 쌀가게 인근에 모인 윤세주, 최종관 등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시위를 시작하였다. 나팔을 불고 소형 깃발을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군중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최종관은 박만수, 이장수(李章守)와 함께 대형 깃발을 교대로 들면서 선두에 서서 장터를 행진하였다. 밀양면의 헌병과 경찰뿐만 아니라 부산에서 급파된 헌병, 수비대까지 합세해 시위대를 무력으로 탄압하였고, 시위대는 결국 해산하였다.
최종관은 이날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았다. 부산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 후 8월 14일 출옥하였다. 최종관은 1977년 12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최종관에게는 199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