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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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朴作之 |
영어공식명칭 | Park Jakji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하지영 |
출생 시기/일시 | 1897년 1월 20일 - 박작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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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9년 3월 13일 - 박작지 밀양 3·13 만세운동에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4일 - 박작지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태 90대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36년 9월 13일 - 박작지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17년 8월 15일 - 박작지 대통령 표창 추서 |
출생지 | 내일동 -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 88 |
활동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작지(朴作之)[1897~1936]는 1897년 1월 20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내일동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윤세주(尹世胄)와 윤치형(尹致衡)은 고종 인산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에 갔다가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를 목격하고 돌아왔다. 서울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한 후 고향으로 돌아온 윤세주 등은 동화학교(同和學校) 교장인 전홍표(全鴻杓)를 찾아가 서울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전하며 밀양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논의하였다. 이후 본격적인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
윤세주는 3월 11일과 12일 밀양면 내이동(內二洞) 등지를 돌며 정동찬(丁銅燦), 최종관(崔鍾貫), 설만진(薛萬鎭), 박만수(朴萬守), 박소종(朴小宗) 등의 동지를 규합하였고, 윤치형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깃발과 태극기 수십 개를 만들었다.
1919년 3월 13일은 밀양면 읍내 장날로, 정오 무렵 장터에는 1,000여 명의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오후 1시경 내일동 김병환(金鉼煥) 쌀가게 인근에 모인 윤세주, 윤치형 등은 ‘조선독립만세’라 쓴 대형 깃발을 앞세우고 시위를 시작하였다. 나팔을 불고 소형 깃발을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모인 군중들도 이에 호응하였다. 당시 박작지는 내일동에서 자동차 수선업 직공으로 종사하고 있었는데, 밀양공립보통학교 뒤편에서부터 시위에 참가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 곳곳을 행진하였다. 또한 김상득(金尙得), 양쾌술(梁快述), 엄청득(嚴淸得) 등과 함께 「조선독립신문」이라는 문서를 군중에게 배포하였다. 밀양면의 헌병과 경찰뿐만 아니라 부산에서 급파된 헌병, 수비대까지 합세하여 시위대를 무력으로 탄압하였고, 시위대는 결국 해산하였다.
박작지는 1919년 3월 13일 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동지들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14일 부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 박작지는 1936년 9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박작지에게 2017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