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6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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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一三 萬世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구진성 |
[정의]
1919년 3월 13일 전홍표의 지도 하에 윤세주 등이 주도하여 밀양 읍내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운동.
[역사적 배경]
윤세주와 윤치형은 고종의 장례에 참가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3·1운동을 목격하고 밀양으로 내려와 동화학교 교장 전홍표를 찾아가 밀양에서의 시위를 계획하였다.
[경과]
전홍표의 지도 하에 김병환, 이장수 등을 규합하여 시위를 준비하였고, 정동찬의 집에서 여러 동지들을 설득하여 1919년 3월 13일 밀양 읍내 장날에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연판첩에 압인하였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기 위하여 부북면 사무소와 밀양면사무소에서 등사판을 훔쳐와 야밤에 아북산에서 수백 장을 등사하였다. 이렇게 제작된 「독립선언서」를 태극기 수십 개와 함께 윤세주의 집에 감추어 두었고, 윤치형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대형 깃발 1개와 소형 태극기 수십 개를 김병환에게 전달해 두었다.
1919년 3월 13일 수천 명에 달하는 군중이 밀양 읍내 장터로 모여들었고, 오후 1시경 시위 주도자들은 대형 깃발과 태극기를 흔들었고 윤세주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결과]
3·13 만세운동은 부산에서 급파된 일본 헌병과 수비대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의의와 평가]
3·13 만세운동은 밀양에서 일어난 최초의 집단적 시위이며, 이후에 발생한 수차례의 밀양 및 인근 지역 만세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3월 14일과 4월 2일에는 다시 밀양 읍내에서 만세 운동이 이어졌고, 4월 4일에는 단장면 태룡리, 4월 6일에는 부북면 춘화리, 4월 10일에는 청도면 인산리에서 크고 작은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독립운동은 일제의 병력 증강과 폭력적 진압으로 인하여 4월 말에는 사실상 종식되지만, 당시 밀양 지역 만세 운동을 주도한 윤세주는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의열단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