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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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포천 출신의 효자. 구규석(具揆錫)의 아버지 무이처사(武夷處士)는 젊어서 일찍 부인을 잃고 명산(名山)을 두루 살피며 시문을 즐기는 일 이외에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오랫동안 방랑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45세 때 황해도 어느 마을의 무남독녀인 문화 유씨와 재혼하여 3남 1녀를 낳았는데, 구규석은 그 중 장남이다. 구규석은 15세 때인 1877년(고종 14) 연로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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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권감(權弇)은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롭게 살면서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모셨다. 일곱 살 때는 어머니의 발이 독에 감염되어 붓게 되자 상처를 입으로 빨아서 병을 낫게 하였고, 그로 인해 어머니는 30년을 더 살게 되었다. 그 후 어머니 상을 당하여 슬픔과 애통함이 지극해서 귀밑의 머리카락이 모두 백발이 될 정도였다. 또 어머니를 지극히 생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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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김수일(金壽一)은 김수인(金壽寅)의 형으로,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두 동생과 함께 살면서 홀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1679년(숙종 5)에는 사마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글은 배우면 되고 재물은 노력하면 얻을 수 있으나, 효우(孝友)는 하늘에서 명한 것이니 어찌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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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字)는 공숙(公叔). 아버지는 진사 류연(柳演)으로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동생은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류지선(柳智善)이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류전(柳㙉; 동생 류예선의 아들)의 백부이다. 류인선(柳仁善)[1492~?]은 포천현 서쪽 자작촌[지금의 포천시 자작동]에서 태어나고 생활하였다. 5형제 중 맏이로, 동생인 류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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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字)는 숙윤(叔胤). 할아버지는 명종 때 효우비를 받은 류인선(柳仁善)이고,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류첩(柳堞)이다. 동생으로 임진왜란 때 효행으로 정표를 받은 류홍서(柳弘緖)가 있다. 류찬서(柳纘緖)는 포천현 서쪽 자작촌[지금의 포천시 자작동]에서 태어나 생활하였다. 임진왜란 때 동생 류홍서가 어머니 윤씨 부인을 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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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류필성은 포천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향리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사림들이 효행 단자를 올리자 이시원(李是遠)이 상소를 올렸다. 1838년(헌종 4)에 효자 정려가 내려졌다. 『포천 군지』에는 류필성(柳弼成)의 효자비가 포천읍 사무소[현 포천동 주민 센터] 옆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옛 포천읍 사무소가 있던 자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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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문화(文化). 자(字)는 계윤(季胤). 할아버지는 효우비를 받은 류인선(柳仁善)이고, 아버지는 병절교위(秉節校尉) 류첩(柳堞)이다. 형은 임진왜란 때 효행으로 정표를 받은 류찬서(柳纘緖)이다. 류인선의 동생 류지선의 아들 류성(柳城)의 양자로 들어갔다. 류홍서(柳弘緖)는 포천현 서쪽 자작촌[지금의 포천시 자작동]에서 태어나고 생활하였다. 임진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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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학자이자 효자.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중준(仲峻). 할아버지는 기묘명현(己卯名賢) 신상(申鏛)이고, 아버지는 별검 신화국(申華國)이다. 4형제 중 둘째아들이다. 첫째는 병조판서 신잡(申磼)이고, 셋째는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패한 후 자결한 삼도 순변사 신립(申砬)이며, 넷째는 경기 병사로 임진강에서 전사한 신할(申硈)이다. 포천에서 태어난 신급(申礏)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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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평산(平山). 학자이자 효자인 신급(申礏)의 5세손이다. 신윤하(申胤夏)는 포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글 읽기를 좋아하였고, 약관의 나이에 모든 경서를 독파하여 통달하였다. 점차 학문과 인품이 고매하기로 소문이 나자 이웃사람들이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하여 나랏일을 도울 것은 자주 권하였다. 이에 신윤하는 자신이 독신이기 때문에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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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안순창(安順昌)은 원래 강원도 회양(淮陽)이 고향인데, 1731년(영조 7)에 내촌면 소학리로 이사하였다. 평소 근검절약하며 살았으나 홀로 되신 어머니만은 극진하게 봉양하였다. 1746년(영조 22) 3월 살고 있던 집에 불이 나,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불길이 맹렬히 치솟았다. 겨우 몸만 빠져나온 안순창은 아무리 찾아도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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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보성(寶城). 자는 국경(國卿). 할아버지는 증직 공조참의 오경춘(吳慶春)이고, 아버지는 증직 한성부 우윤 오만(吳晩)이다. 어머니는 청주 양씨 양수기(楊壽起)의 딸이고, 부인은 단양 우씨 우신달(禹信達)의 딸이다. 자식은 3남매를 두었고, 아들은 오상호(吳相虎)이다. 오백주(吳伯周)는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어룡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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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 보성(寶城). 증조할아버지는 구성 부사를 지낸 효자 오백주(吳伯周)이다. 아버지는 오필(吳必)이며, 어머니는 함열 남궁씨(南宮氏)이다. 오수진(吳壽晉)은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어룡동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한천(寒泉)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평소 부모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하여 효행이 인근 마을까지 널리 알려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지성을 다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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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현숙(顯叔), 호는 물재(勿齋). 숙종 때 개성 부사를 지낸 유창(兪瑒)의 둘째아들이다. 유회일(兪晦一)[1642~1691]은 지금의 포천시 일동면 유동리 용호동에서 태어났다. 숙종 때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학덕이 매우 높았다고 한다. 강원도 양양 도호부 강현면 물치리(勿淄里)[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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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에 살았던 효자. 본관은 전주. 자는 국빈(國賓). 고조할아버지는 종실(宗室)의 의성군(義城君)이다. 이관하(李觀夏)는 포천시 가산면 화산리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품행이 방정하여 가난한 살림에도 부모 봉양에 지극정성이었다. 아버지가 오랜 기간 병을 앓았는데, 음식을 손수 받들어 드시게 하고 약도 먼저 맛을 본 후에 드렸다. 밖에서 맛난 음식을 대하면 먹지 않고 집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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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이기령(李箕齡)은 가산면 추곡리[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나이 13세 때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나이 14세 때에 아버지 상을 당하여 집상에 어긋나지 않았으며, 3년간을 묘 앞에 여막을 짓고 어머니와 함께 시묘하였다. 어느 날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나 여막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는데 마치 여막을 호위하는 듯하였으며, 그 뒤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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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전주. 자는 요서(堯瑞). 아버지는 현감 이봉룡(李鳳龍)이고,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의 9세손이다. 이명(李蓂)은 1614년(광해군 6)에 출생하여 포천현의 동쪽 5리에 있는 성북촌에 살았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여막을 짓고 3년간 아침저녁으로 묘에 올라 곡을 하였으며, 묽은 죽 한 그릇만 먹고 지냈다. 어느 날 흰 까치가 이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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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의 효자. 이석순(李碩淳)은 가난한 집안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살았지만, 구걸하면서도 홀어머니에 대한 봉양을 극진히 하여 인근 마을에까지 소문이 자자하였다. 어머니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통곡하였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도평리에 있다. 향리에서 천거하여 호역(戶役)은 면제받았으나, 효자비를 세우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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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자겸(子謙). 병조판서 이계손(李繼孫)의 후손이다. 이지익(李志益)은 효행이 뛰어난 효자로, 계모가 병이 들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병세가 위독해지면 추운 겨울임에도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하여 효험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다 계모가 돌아가자 3년 동안 채소와 죽만 먹으면서 시묘하였다. 1720(숙종 46) 사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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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포천 출신의 효자. 사인(士人) 이작(李焯)의 서자이고, 판결사(判決事) 이수(李琇)의 5세손이다. 이진철(李震喆)은 견성현 갈와리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정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부유한 집에서 품을 팔아 부모를 섬겼지만 늘 부족하여 겨우 빈천함을 면할 정도였다. 후에 면천(免賤)이 되었어도 옛 주인을 섬기는 데 예의를 다하였다. 면천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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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정기상(鄭箕相)은 일찍이 홍매산(洪梅山)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배웠는데, 머리가 좋고 총명하여 수학하는 동문 중에서는 학행이 가장 뛰어났다. 그러나 과거에는 번번이 낙방을 하였으며, 오히려 그보다 못하였던 동문들은 급제를 하곤 하였다. 그러자 정기상은 ‘과거에 급제하는 것도 팔자소관’이라고 하면서, 배운 대로 정성껏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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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정기오(鄭其五)는 조선 경종대의 효자로, 본래 신분은 노비였으며 포천 선단리에서 살았다. 1724년(경종 4) 6월 어느 날 어머니가 마을에 나타난 호랑이에게 환란을 당하였다. 그러자 정기오는 혼자서 산속으로 들어가 호랑이를 추격하여 호랑이 굴을 찾아내, 목숨을 걸고 맨손으로 싸워서 호랑이를 때려눕히고 어머니를 구해 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큰일을 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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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정선징(鄭善徵)은 포천 소흘면 소흘산에 살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정주흥(鄭周興)과 함께 효로써 칭송을 받았다. 13세 때 아버지가 병으로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소생시켰다. 조정에 알려져 복호(復戶)의 은전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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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한양. 자는 성득(聖得). 할아버지는 참판 조위명(趙威明)이고, 아버지는 참봉 조구령(趙九齡)이다. 조수덕(趙守德)[1695~1745]은 포천읍 출신이다. 타고난 효성으로 부모 봉양에 극진하였으며 『소학(小學)』을 행실의 근본으로 삼았다. 부모의 뜻을 받들고 거동에 불편이 없도록 하였으며, 처자는 굶주리게 할지언정 부모님께는 항상 좋은 음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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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한양. 자는 경소(敬所). 우의정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 조연(趙涓)의 6세손이고, 아들은 용주(龍洲) 조경(趙絅)이다. 조익남(趙翼男)[1564~?]은 포천현 북쪽 10리 떨어진 가차리(加次里)[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 살았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다. 나이 50세에 부모의 상을 당해서는 3년을 시묘하면서 소식(疏食)하며 하루도 거르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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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한양.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막내 동생인 목사(牧使) 조숭조(趙崇祖)의 현손이다. 조익창(趙益昌)은 포천현 남쪽 20리 떨어진 화산(花山) 정교촌(鄭橋村)[현 포천시 가산면 정교리]에서 살았다. 천성이 곧고 자못 상의기부(尙意氣賦)하였으며, 효우(孝友)하였다. 노모를 모시는 데 성의를 다하여 몸소 정성껏 봉양하였고, 네 동생과 화합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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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조항일(趙恒一)은 자는 여중(汝中)으로, 포천현의 남쪽 20리 떨어진 화산(花山)[현 포천시 가산면 가산리]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용주(龍洲) 조경(趙絅)에게 학문을 배웠다. 성장해서는 홀로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아버지가 병으로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베어 혈서를 써서 천지신명께 빌며 자신의 수명을 줄여서라도 아버지의 수명을 연장케 해 달라고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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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수성. 형은 효자 최천주(崔天柱)이고, 최천후(崔天後)의 사촌 형이다. 부인은 광주(廣州) 김씨이다. 고려 시대에 수성백(隋城伯)에 봉해진 최영규(崔永奎)의 후손이다. 『포천 군지』에 수록된 효자 최천후(崔天候)는 사촌 동생 최천후(崔天後)와 같은 인물로 추측된다. 최천극(崔天極)[1602~1636]은 포천의 읍치 남쪽 20리 떨어진 화산(花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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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자. 본관은 수성. 효자 최천주(崔天柱)·최천극(崔天極)의 사촌 동생이고, 고려 시대에 수성백(隋城伯)에 봉해진 최영규(崔永奎)의 후손이다. 『견성지(堅城誌)』에 수록되어 있는 최천후(崔天後)와 같은 인물로 추측된다. 최천후(崔天候)[1612~1636]는 포천 가산면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효성이 뛰어났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
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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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열녀. 밀양 박씨(朴氏)의 남편 김세열(金世說)은 1734년(영조 10)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조정에서 가족에게 휼전을 내려 주었다. 부인 밀양 박씨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결심하였으나 가족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어느 날 밤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유교리에 열녀 정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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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열녀. 김응기(金應箕)의 처 전주 이씨(李氏)는 포천 군내면 청량촌에 살았다. 1743년(영조 19) 봄에 남편이 병에 걸려 눕게 되자, 전주 이씨는 고단하다 하지 않고 농사일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면서 한편으로 남편의 병간호를 극진히 하였다. 그러나 전주 이씨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그해 여름 죽고 말았다. 이에 전주 이씨도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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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열녀. 독실은 조선 시대 사노비 출신이며,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남편 전가음불(田加音弗)이 강원도에 행상을 갔다가 금성(錦城)에서 객사하자, 집안에 보관하던 물건을 모두 팔아 그 돈으로 직접 금성에 가서 남편의 시체를 고향으로 옮겨와 장사지냈다. 독실은 장차 자신이 죽으면 남편과 같은 곳에 묻어 달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그 말을 믿지 않았으나, 남편의 장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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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포천 출신의 열녀. 열녀 정씨(鄭氏)는 남편이 갑자기 알 수 없는 괴질에 걸리자 온갖 정성을 다하여 치유하려고 노력하였지만 효험이 없었고, 남편의 병은 더욱 깊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문병객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면 완치할 수 있다고 하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도려내 남편에게 먹여 쾌유시켰다. 완쾌된 남편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가 무르익을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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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포천 출신의 열녀. 열녀 진주 유씨(柳氏)는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맥구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반듯한 몸가짐과 행동거지로 남달랐다. 혼기가 차서 인근 마을의 구광석(具光錫)에게 출가하여,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여 남편과 시부모를 극진하게 모시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남편이 2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진주 유씨가 남편의 장례를 마칠 때까지 정성을 기울이며 애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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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포천 출신의 열녀. 염두찬(廉斗纘) 처 최씨(崔氏)는 평민으로 태어나 염두찬에게 시집갔다. 어느 날 남편이 고기를 잘못 먹고 갑자기 사망하자 장례를 치르는 날 자신도 극약을 먹고 남편의 관 옆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 『견성지』에는 소금물을 먹고 죽었다고 전한다. 나라에서 최씨의 정절을 기려 정문을 내렸다. 열녀 정문은 포천 가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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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부이자 열녀. 본관은 경주(慶州). 시아버지는 효자 이지익(李志益)이고, 남편은 이시진(李時鎭)이다. 이시진 처 경주 최씨(崔氏)는 이시진에게 시집와서 포천군 포천읍 어룡리에 살았다. 당시 거동을 못하는 병약한 시어머니를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섬기면서 병을 간호하였다. 오랜 투병 끝에 시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애통함이 지나쳐 몸과 마음을 상하게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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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포천 출신의 열녀. 이재흘(李在屹) 처 아성 이씨(李氏)는 포천 용정촌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혼기가 차서 이재흘과 혼인하기로 결정되었으나, 병인년 겨울 혼례식이 있던 날 신랑이 갑자기 괴이한 병에 걸려 본가로 돌아갔다. 이씨가 친정에 있은 지 한 달이 지난 후 꿈에 신랑이 죽은 모습으로 나타나자 남편의 사망을 예견하였다. 얼마 후 과연 부음이 도착하여, 일체 음식을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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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열녀. 본관은 청송(靑松). 아버지는 현감 심주관(沈周觀)이고, 남편은 사인(士人) 조억(趙億)이며, 시아버지는 참봉 조구령(趙九齡)이다. 조억(趙億)의 처 청송 심씨(沈氏)는 효경상순(孝敬祥順)하여, 시부모를 받드는 데 성의를 다하였고 남편을 섬기는 데도 어긋남이 없었다. 남편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잠자리에 들지 않고 약을 구하고 끓이는 데 몸과 마음을 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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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포천 출신의 열녀. 최연식(崔淵植)의 처 청풍 김씨(金氏)는 포천 출신이다. 남편이 죽자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이미 아이를 가진 지 8개월이나 되었으므로 아이를 낳은 다음에 죽을 결심을 하였다. 홀로 아이를 낳은 지 4일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자, 마을에서 그 절의를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우화만고(耦畵謾稿)』에 전한다고 하는데, 어떤 자료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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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열녀. 본관은 안동. 아버지는 동추공 김종숙이며, 남편은 세조 때 목사와 성균관 사성 등을 역임한 홍의달(洪義達)이다. 남동생은 문정공 김질이다. 김질은 단종 복위 거사를 함께 논의하다 거사가 연기되자 장인 정창손에게 고하여, 사육신은 물론 상왕으로 물러나있던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등시켜 영월로 유배 보낸 장본인이다. 김질은 그 공으로 좌익공신에 책록되어 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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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열녀. 숙종 때의 학자로 의학뿐 아니라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 『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한 황엽(黃曄)이 전주 이씨의 남편 황효겸(黃孝謙)의 종손이다. 황희의 6세손인 주부(主簿) 황효겸의 처 전주 이씨는 병자호란 때 오랑캐의 능욕을 피하기 위해 지니고 있던 칼로 자결하였다. 포천에는 12명의 정문을 받은 열녀가 있는데, 그 중 한...
효부·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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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부. 이임재(李壬才)는 소홀산 아래에서 미모의 소녀로 성장하여 사노(私奴) 장귀일(張貴日)과 혼인하였다. 나이 27세 때인 1698년(숙종 24)에 괴질로 시아버지와 남편이 모두 사망하였다. 여자의 몸으로 힘든 장례 준비를 열심히 하였으며, 때를 놓치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통곡하며 예를 다하자 이웃 사람들이 감동하여 도와주었다. 이후에도 홀로된 시어머니를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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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녀. 만호 정창국(鄭昌國)의 처 창원 유씨(兪氏)의 이름은 용녀(溶女)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남편이 병으로 죽자 직접 염을 하여 장례를 치렀다. 집안사람들이 난리를 피하라고 권유하자, “죽는 것은 하늘에게 달린 것으로, 난리를 당하였는데 어찌 살기를 바라겠는가.”라고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청나라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치자 노복들의 부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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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효부. 조상의(趙尙義)의 처 함평 이씨(李氏)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10여 세 때 어머니가 병이 들어 의원에게 보이자 온밀(溫蜜)을 복용하면 효험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집안 사정으로 구하지 못하고 근심하고 있던 중에 꿀벌 떼가 집으로 날아들었고, 이를 받아 키워 어머니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 출가하여서는 큰 종기로 고생하는 시아버지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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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포천 출신의 효녀. 첨지 정기(鄭璣)의 처 최씨(崔氏)는, 출가하기 전에 아버지가 호랑이에게 물려가자 단검을 들고 울부짖으며 하늘에 맹세하고 호랑이에게 다가갔다. 이에 호랑이가 슬그머니 물러나 도망하였다. 최낭(崔娘)으로도 전한다. 조정에서 정려를 하사하였다. 정려는 포천현의 남쪽 20리 떨어진 화산(花山)에 있다....
충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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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충성스러운 노비. 박귀동(朴貴同)은 진잠 현감을 지낸 이만증(李萬增)의 노비였다. 이만증이 어려서 홀로 됐는데, 30여 년 동안 가난한 주인을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루 같이 모셨다. 자녀가 10여 명이고, 손자는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박귀동은 포천현의 남쪽 청량촌(淸凉村)[현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에서 살았다. 이만증이 어려서 홀로 되어 가세가 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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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충노(忠奴). 이험산(李險山)은 진사 이수온(李守溫)의 하인으로 고장산 아래에서 살았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갑자기 적병들이 들이닥치자 사람들이 모두 달아났는데, 이험산의 주인만 병든 몸이라 피난을 갈 수 없어 어린 자식을 어루만지며 울고 있었다. 이험산은 측은한 생각이 들어 자기 가족은 두고 주인 아들을 업고 도망쳐서 충성스런 마음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