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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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抱川道中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이병찬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82년 - 「포천도중」 저자 조인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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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830년∼1838년 - 조인영 「포천도중」 창작 시작 |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830년∼1838년 - 조인영 「포천도중」 창작 종료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850년 - 「포천도중」 저자 조인영 사망 |
성격 | 한시 |
작가 | 조인영 |
[정의]
1830년에서 1838년까지 조인영이 포천으로 가는 길에 추위를 탈 정도로 찬바람이 불 즈음에 우연히 지은 칠언 율시의 한시
[개설]
「포천도중(抱川道中)」은 1830년(순조 30)부터 1838년(헌종 4) 사이에 조선 후기의 문신 운석(雲石) 조인영(趙寅永)[1782~1850]이 포천으로 가는 도중 찬바람이 심하게 불어 추위를 탈 때에 뜻하지 아니하게 지은 한시이다.
조인영은 자가 희경(羲卿)이요, 호는 운석이다. 본관은 풍양(豐壤)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이지연(李止淵)[1777~1841], 정원용(鄭元容)[1783~1873], 조수삼(趙秀三)[1762~1849] 등과 교유했다. 1805년(순조 5) 생원시에 합격하고, 1819년(순조 19) 문과에 장원하여 전적이 되었다. 이후 함경도 암행어사, 대사성, 경상도·전라도 관찰사를 지내고, 1832년(순조 32) 공조판서가 되었다. 이조·예조·호조판서를 거쳐 1841년(헌종 7) 영의정에 올랐다. 사후에 헌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포천도중」은 조인영의 문집인 『운석유고(雲石遺稿)』 권(卷) 3의 시(詩)에 실려 있다. 『운석유고』는 20권 1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3에는 1830년부터 1838년까지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
「포천도중」[포천 길에서]의 제목에는 “풍세심려파랭 우음(風勢甚厲怕冷 偶吟)[추위를 탈 때 정도의 찬바람에 우연히 읊다]”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처풍박박습춘구(凄風拍拍襲春裘)[슬슬한 바람을 어루만지며 몸 옷깃 적시고]
만완명료랭불수(滿椀名醪冷不收)[주발에 가득한 술 차가워서 받을 수 없다]
공취사분방초안(空翠乍分芳草岸)[푸른 하늘 언뜻 보니 꽃다운 풀언덕 같아]
암황재동눈양주(暗黃才動嫩楊洲)[어두운데 재능 있듯 버들잎 솟아오르네]
고연야점무시마(孤烟野店無嘶馬)[외로이 연기 나는 주막에 말울음 안 들리고]
영우산전유질우(零雨山田有叱牛)[찬비 내리는 화전에는 밭갈이하는 소리네]
여차량진화사묘(如此良辰花事杳)[이리 좋은 날에 별과 꽃은 아직 피지 않고]
권정하이위한수(倦程何以慰閒愁)[곤한 여정에 어찌 한가로이 시름을 위로 받는가]
[특징]
1804년(순조 4)에 금강산을 유람하였는데, 「포천도중」도 50세 전후에 친구와 함께 여행에 나섰다가 포천 길에서의 심회를 노래한 작품이다. 나그네의 쓸쓸한 심회가 잘 그려져 있다.
[의의와 평가]
조인영의 맏형 조만영(趙萬永)[1776~1846]의 장녀가 1819년(순조 19) 효명 세자(孝明世子)의 빈으로 신정 왕후(神貞王后)에 오르자, 풍양 조씨의 본격적인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조만영은 어영대장을 겸직하면서 실력자로 부상해 풍양 조씨 세도의 기초를 튼튼히 마련한 핵심적인 인물이다. 조인영은 문장에 능하여 문형(文衡)을 두 차례나 지냈고, 금석학에도 일가견이 있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와 함께 진흥왕 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고증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