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8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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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望抱川山城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정흥모 |
[정의]
1637년 강원도 암행어사 김홍욱이 포천의 어느 산성을 바라보며 지은 칠언 절구의 한시.
[개설]
「망포천산성(望抱川山城)」은 조선 후기의 문신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1602~1654]이 강원도 암행어사로 가는 길에 포천의 어느 산성에 이르러 느낀 감흥을 적은 한시이다. 「망포천산성」은 김홍욱의 문집 『학주전집(鶴洲全集)』 권(卷) 1의 「동행록(東行錄)」에 실려 있다. 「동행록」은 김홍욱이 강원도 암행어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지은 글이 수록되어 있다.
[내용]
「망포천산성」의 제목 옆에 “거주민들이 말하길, 유희량(柳希亮)[1575~1628]이 감사로 있던 시절에 쌓은 것이라고 한다[居民云 柳希亮爲監司時所築].”는 주석이 붙어 있다. 「망포천산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성분첩세위이(高城粉堞勢逶迤)[높은 성의 석회 바른 성가퀴의 형세는 굽이굽이 이어지는데]
낙일한운고목비(落日寒雲古木悲)[해질녘에 찬 구름 고목들은 슬퍼진다]
필경적래성저용(畢竟賊來成底用)[결국에는 적이 쳐들어와서 그들의 바탕을 이루었으니]
지금인소류감사(至今人笑柳監司)[지금까지 사람들이 유 감사[유희량]를 비웃네]
[특징]
1618년(광해군 10) 7월에 경기 감사(京畿監司) 유희량이 장계(狀啓)를 올려 북관(北關)의 직로(直路)에 유독 진(鎭)을 설치한 곳이 없고 포천, 영평도 다 잔파되어 형편없으니 두 고을 경계에 부(府)를 설치하여 외영(外營)이라 칭하고 문관 판관(判官)을 파견하여 파주와 형세가 상응하게 하는 문제를 비변사로 하여금 지휘하여 처리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같은 해 10월 비변사에서 올린 계(啓)에 의하면 “영평과 포천을 합해서 한 부로 만들고 그대로 감영을 설치하여 북로에 대비하는 것은 중한 일이므로 판관을 내보내서는 안 되고 마땅히 감사로서 부윤을 겸하게 해야 한다.
…… 영평에 새로 설치하는 부도 대도호부(大都護府)라고 칭하여 그 체면을 중하게 해서 본도 감사로 하여금 겸하게 하고 판관은 이번 정사에서 시종 문관 중에 재망이 있는 자를 급히 가려서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고 있어 포천과 영평을 합친 도호부의 설치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포천과 영평이 통합된 시기는 기존의 수령이었던 이성구(李聖求)[1584~1644]가 도호부의 판관이 되었다. 그러나 1620년(광해군 12년) 이성구가 파직되고 경기 감사였던 유희량이 영평 판관(永平判官)을 겸직하여 포천과 영평을 합친 도호부에 부임을 해 왔다.
「망포천산성」의 내용을 통해 보면 유희량은 도호부에 부임을 해서 방어를 위하여 성을 쌓은 듯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성들이 적들에 점령되어 그들의 본거지가 되자 주민들이 1637년(인조 15)에도 비웃고 있다. 여기서 나오는 적들을 상정해보면 1624년(인조 2)의 이괄(李适)의 난, 1627년(인조 5)의 정묘호란(丁卯胡亂), 1636년(인조 14)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이괄의 군대, 청나라의 군대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중 이괄의 난 가담 군대 가운데 “포천 등산(燈山)의 승군(僧軍)으로 정예한 자가 50인”이 있다는 『인조실록(仁祖實錄)』의 기록을 통해 보면 「망포천산성」에 나오는 적군은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승군들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망포천산성」의 내용을 통해서 광해군 재위 시기 한양 주변 방어를 위해 영평과 포천을 통합한 도호부에 산성을 쌓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포천 지역 산성들의 건축, 증축 시기의 편년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