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2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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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勉 |
이칭/별칭 | 운석(雲石)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이계형 |
수학 시기/일시 | 1906년 - 장면 박문 학교 입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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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3년 - 장면 서울 동성 상업학교 교사로 부임 |
몰년 시기/일시 | 1966년 06월 04일 - 장면 사망 |
출생 시기/일시 | 1899년 8월 28일 - 장면 출생 |
출생지 | 장면 출생지 - 인천광역시 |
묘소 | 장면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 |
성격 | 정치가 |
성별 | 남 |
본관 | 인동(仁同) |
대표 경력 | 제2공화국 내각 국무총리 |
[정의]
경기도 포천시에 묘가 있는 정치가.
[활동 사항]
장면(張勉)[1899~1966]의 호는 운석(雲石)으로, 인천광역시에서 출생하였다. 8세에 인천 성당에서 운영하는 박문 학교(博文學校)에 입학,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7년 수원 고등 농림 학교[서울 대학교 농업 생명 과학 대학 전신]를 졸업하였다. 1919년 YMCA 영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25년 한국 천주교 청년회 대표 자격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맨해튼 가톨릭 대학 문과를 마치고 로마에서 열린 ‘한국 79위 순교복자 시복식’에 참석하였다.
귀국 후 천주교 평양 교구에서 교회 일을 보다가 1913년 서울 동성 상업 학교에 부임하였다. 1936년 서울 동성 상업 학교 교장이 되었으며, 계성 학교 교장직도 겸임하여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근무하였다. 1933년 천주교 서울 교구에서 발행한 월간 잡지 『가톨릭 청년(Catholic靑年)』 편찬위원을 맡았으며,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 회장으로도 활동하였다.
1946년 장면은 정계에 진출하여 ‘남조선 대한국민 대표 민주 의원’ 의원과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 등을 거쳐 1948년 서울 종로 을구에서 제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같은 해 겨울,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조병옥(趙炳玉)·장기영(張基永) 등과 한국 수석대표로 참석, 총회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국제적 승인을 얻어냈다.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맨해튼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49년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6·25 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의 한국 파병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51년 국무총리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사임하였다. 이후 야당의 지도자로 자유당 독재 정권과 투쟁하였다. 1955년 국회 의장을 지낸 신익희(申翼熙)·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여 최고 위원이 되었고, 1956년 자유당의 부통령 입후보자 이기붕(李起鵬)을 물리치고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해 9월 민주당 전당 대회에서 김상붕에게 저격당했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7년 미국 시튼홀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민주당 최고 위원에 선출되어 곽상훈(郭尙勳)·박순천(朴順天) 등과 함께 민주당 신파 영수로 활약하였다.
1960년 민주당 구파 조병옥(趙炳玉)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했다가 조병옥이 선거 1개월을 앞두고 사망하여 또다시 부통령 후보로 선거에 임했는데, 3·15 부정 선거로 인해 이기붕(李起鵬) 자유당 후보에게 833만 표 대 180만 표 차이로 낙선하였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후 의원 내각제 하에서 1960년 제5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고, 국회에서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잡았다.
집권 후 장면은 민주당 구파가 신민당을 창당, 이탈해 나가는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던 정책이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여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뒤 군사 정권의 정치 정화법에 묶여 연금 생활을 강요당하고, 세칭 이주당(二主黨) 사건인 반혁명 음모 사건에 연루,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형 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 5년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1966년 6월 4일 지병인 간염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구도자의 길』[1930], 『조선 천주공교회 약사』[1931], 『한 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1964] 등이 있으며 역서로 『영한 교회 용어집』[1929], 『교부들의 신앙』[1944, 『젬마 갈가니』[1953], 『나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나』[1962], 『성 원선시오』[1964] 등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에 있는 가톨릭 묘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1951년 로마 교황청 비오 12세로부터 성신 베스터 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