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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형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180
한자 姜芝馨
이칭/별칭 강시형(姜始馨)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정교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이계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추모 시기/일시 1963년 - 강지형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 - 강지형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몰년 시기/일시 1931년 04월 08일연표보기 - 강지형 사망
출생 시기/일시 1881년 3월 18일연표보기 - 강지형 출생
출생지 강지형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정교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한 독립단 경기도 지단 조직 전권 위원

[정의]

일제 강점기 경기도 포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강지형(姜芝馨)[1881~1931]은 1881년 3월 18일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정교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 독립단(大韓獨立團)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헌교(李憲敎)·이민태(李敏台)·한남수(韓南洙)·이규갑(李奎甲)·김사국(金思國) 등과 서울특별시 종로구 내자동 한성오(韓聖五)의 집에서 모임을 열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및 국민 대회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토의하고 국민 대회 취지를 작성하였으며, 이때 강지형은 13도 대표 25명 가운데 한 명으로 참가하였다.

1919년 12월 만주로 망명하여 중국 지린 성[吉林省] 관전현(寬甸縣)에서 대한 독립단에 입단하였고, 박장호(朴長浩) 총재로부터 경기도 지단(支團)을 조직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대한 독립단은 복벽주의(復辟主義)[왕정을 복고시키겠다는 것] 인사들인 박장호·안병찬(安秉瓚) 등이 만든 단체로 중국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근거를 두고 독립운동을 하던 단체이다. 대한 독립단은 국외에서의 활동만으로는 주권을 회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국내 각 지방에 지단을 설치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서울에 중앙 본부를 조직하여 국내외 연락을 공고히 하여 군자금 모집에 편의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강지형은 1920년 1월 대한 독립단 경기도 지단 조직 전권 위원에 임명되어 같은 해 8월 서울로 들어와 성동구 상왕십리동에 거주하였다. 그 뒤 이전에 특파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지단을 조직하던 김기한(金起漢)과 접촉하여 비밀리에 서울에 중앙 본부를 조직하고, 각 도·군에 지단을 설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은 첫째로 「격고 국내 진신 사림(檄告國內縉紳士林)」이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배포하였고, 둘째로 군자금 모집과 통신을 위한 통지문 사령장을 제작하였으며 「경고 경향 각부호문(警告京鄕各富豪文)」을 발송하여 군자금을 제공토록 하였다.

그들은 고심 끝에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을 총지휘관으로 삼으면 많은 민중들이 호응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의친왕에게 접근하였으나 일제의 경호가 심하여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강지형의친왕의 무관(武官) 어담(魚潭)의 한문 선생이었던 아버지 강일영(姜一泳)을 설득하여 어담과 접촉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1920년 11월 강지형은 김기한과 함께 어담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잠복해 있던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강지형이 대한 독립단의 지단 설치 임무를 띠고 국내로 잠입한 사실이 발각되어 관련 인사 13명이 붙잡혔으며 다수의 독립운동 관련 문서가 압수되었다. 1921년 9월 30일 경성 지방 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1년 4월 8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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