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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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箕男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진각 |
출생 시기/일시 | 1598년 - 이기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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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630년 - 이기남 진사가 됨 |
몰년 시기/일시 | 1680년 - 이기남 사망 |
출생지 | 이기남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
묘소|단소 | 이기남 묘소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
성격 | 무신 |
성별 | 남 |
본관 | 경주(慶州) |
대표 관직 | 지중추부사 |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숙(靜叔). 할아버지는 참찬 이몽량(李夢亮)이고, 아버지는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이며, 어머니는 감찰 오언후(吳彦厚)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기남(李箕男)[1598~1680]은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어머니의 절행(節行)으로 정경세(鄭經世)가 경연(經筵)에서 천거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1631년(인조 9) 북방에서 야인이 자주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자 자진해서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군함(軍銜)으로서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扈從)하였는데,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 나가 싸웠으며, 험난하다고 하여 피하지 아니하였다. 일찍이 오랑캐 진영에 사신을 보내야 하였으나 모두들 그 사행(使行)을 꺼려하였다. 이기남이 자원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사행(使行)을 공들은 모두 피하는데 나에게 위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이조판서와 함께 오랑캐 진영에 가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
난이 평정된 뒤 홍원 현감·영암 군수를 거쳐 동지중추부사로 승진하였다. 당시 평안·황해 양도가 호란으로 인하여 문란해졌던 민정(民情)이 회복되지 않은데다 연행(燕行)의 요충지로 청나라 사신이 빈번히 왕래하는 곳이어서 많은 읍이 피폐하였으므로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1638년(인조 16) 영원 군수로 부임하였다. 그 뒤 양덕 군수와 현감 군수, 수안 군수를 거쳐, 1651년(효종 2) 백령 첨사·이산 군수·풍천 부사·신천 군수·서흥 부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64년(현종 5)에는 장연 부사·상원 군수 등 관서 지방의 외직을 역임하였고,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풍천 부사에서 체임(遞任)할 때에는 오직 쌀 한 섬만을 싣고 귀향할 만큼 청백하였다. 항상 국은(國恩)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리지 않았는데, 인조가 깊이 알아주는 은총을 입었다. 마땅히 크게 쓰였어야 함에도 일부 권신(權臣)의 미움을 사서 벼슬이 군읍(郡邑)에 그쳐 그 재주를 펼 수가 없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