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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74
한자 韓仁及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직동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83년연표보기 - 한인급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01년 - 한인급 진사시 합격
몰년 시기/일시 1644년연표보기 - 한인급 사망
사당|배향지 한인급 신도비 -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직동리
성격 문신|서화가
성별
본관 청주(淸州)
대표 관직 형조 판서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던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화가.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원지(元之), 호는 현석(玄石)·서석(瑞石). 아버지는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우의정 한응인(應寅)이다.

[활동 사항]

한인급(韓仁及)[1583~1644]은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09년(광해군 1)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근무하다가 이듬해 검열, 대교, 봉교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성균관 전적이 되어서는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 『선조실록(宣祖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어 정언과 사서, 수찬 등을 지냈다. 1613년(광해군 5) 아버지 한응인이 선조의 유교칠신(遺敎七臣)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돼 삭탈관직되어 방축(放逐鄕里)[조선 시대에 벼슬을 삭탈하고 제 고향으로 내쫓던 형벌. 유배보다는 한 등급 가벼운 형벌]되자 사직하고,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보령에 은거하였다.

인조반정 후 병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삼도 독향사(三道督餉使)로 임명되어 군량 조달에 힘썼다. 그 후 수찬으로 재직 시 신인 등용책을 건의하였다. 이어서 경연 참찬관, 병조 참의를 역임하고 외직으로 종성 부사, 한성 우윤을 거쳐 지중추부사, 형조 판서, 개성 유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643년(인조 21) 지돈령부사로 인평 대군(麟坪大君)과 함께 심양(瀋陽)에 다녀온 후 치사(致仕)하였다.

[학문과 저술]

글씨에 능하여 당대의 국가 묘주(墓主)나 태학의 장소(章疏), 비문(碑文) 등을 많이 썼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직동리에 있었으나 1980년 화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직동리에 신도비가 있는데, 신도비문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글씨는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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