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73 |
---|---|
한자 | 崔灌 |
이칭/별칭 | 관지(灌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김성환 |
[정의]
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관지(灌之). 증조할아버지는 최이(崔邇)이고, 할아버지는 최유온(崔有溫)이며, 아버지는 최윤옥(崔潤玉)이다. 외할아버지는 양수(楊修)이며, 아내는 황계수(黃季粹)의 딸이다. 형은 최융(崔瀜)이다.
[활동 사항]
최관(崔灌)[?~?]은 1474년(성종 5)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찬인(贊引),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1478년(성종 9) 전 예조 좌랑 조말손(曺末孫), 권건(權建), 전 정랑 유조(兪造), 이종윤(李從允), 이병규(李丙奎)와 함께 중학 관원(中學官員)들과 어울려 공청(公廳)에 모여서 술을 마시고 조비(曹婢) 춘비(春非)를 구타하여 죽인 죄로 장(杖) 100대에 고신(告身)[직첩]을 박탈당하였다. 이후 한성부 참군에 서용되었으나, 다시 옥사를 잘못 처결하여 좌천되어 장악원 직장이 되었다.
1483년(성종 14) 이조 좌랑을 거쳐 사헌부 지평으로 있으면서 서산(西山), 청계산에서 사냥할 때 가까운 고을의 하번(下番)한 군졸을 징발하는 폐단의 시정을 건의하였다. 1486년(성종 17) 지리학이 비록 불경(不經)한 것이라 하더라도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나 인본(印本)이 없어 그릇된 것이 그대로 전해 오고 있다며 교정하도록 건의하였으나, “지리서(地理書)를 교정하는 일은 술가(術家)의 것”이라는 사신(史臣)의 비판이 있었다. 1491년(성종 22) 중직대부(中直大夫) 사헌부 집의로 북방 정벌을 중지할 것을 건의하였고, 이후 예빈시 부정·사간원 사간·사도시 부정을 거쳐 상주 목사에 제수되었다가 축성 종사관(築城從事官)이 되었다. 1501년(연산군 7) 사간원 대사간으로 유자광(柳子光)의 추국을 건의하였고, 1504년(연산군 10) 공조참의, 1506년(중종 1)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