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10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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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嘉錫 |
이칭/별칭 | 여길(汝吉),태촌(苔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성환 |
[정의]
조선 후기 포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신.
[가계]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여길(汝吉), 호는 태촌(苔村). 아버지는 형조 판서 조계원(趙啓遠)이고, 외할아버지는 상촌(象村) 신흠(申欽)이다. 조사석(趙師錫)의 동생으로 아들은 조태억이다.
[활동 사항]
조가석(趙嘉錫)[1634~1681]은 어려서부터 그 총명함이 뛰어났다. 나이 10세에 반양절(潘陽節)의 『통감론(通鑑論)』을 다섯 번이나 읽고 배송(背誦)을 하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주서, 1664년(현종 5) 대교·봉교를 거쳐 1665년(현종 6) 정언이 되었다. 1668년(현종 9) 해운판관으로 있으면서 벼슬과 재물을 탐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기도 하였다.
이조 좌랑 이혜(李嵇)가 그를 정언에 의망(擬望)[삼망(三望)의 후보자로 추천하는 일]하려 하자 참의 이익(李翊)이 그 의도를 탐문하여 집의 김징(金澄)에게 누설하였다. 이에 김징이 동료에게 알리지 않고 바로 왕의 자리 앞에서 아뢰기를 “조가석이 전에 부여현을 맡았을 때 재물을 탐하고 이끗을 좋아하여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하였는데, 본직을 맡고서는 이전 습관이 더욱 고질화되었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이혜가 가석을 정언에 의망하려 할 때 이익이 어렵게 여기자 이혜가 ‘좋은 수가 있다’고 하면서 의망에 넣자고 굳이 청하였다고 합니다. 이혜가 가석의 탐학 방자함을 안 바에는 언책의 직이 어떠한 청선(淸選)인데 감히 사사로움을 꾀하고 벗을 비호하는 밑천으로 삼는단 말입니까. 식견이 전도되고 의사가 아름답지 못합니다. 이 같은 낭관을 전형(銓衡)의 자리에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니 파직하소서. 이조의 해당 당상 역시 구차히 따른 잘못을 면키 어려우니 무겁게 추고하소서.”라고 하였다.
1674년(현종 15) 장령이 되어서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남인을 논핵하였다. 1677년(숙종 3) 장악원정으로 송시열(宋時烈)· 김수항(金壽恒)의 신구(伸救)를 상소했다가 사당을 옹호하였다는 비난을 받아 삭직되었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등용되자 판결사로 기용되었고, 이후 동부승지·우부승지를 거쳐 형조·예조·병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조 참의를 지내다가 사임하고 뒤에 호조참의를 지냈다.
[묘소]
묘갈명은 송시열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