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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028
한자 李國柱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진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87년연표보기 - 이국주 출생
몰년 시기/일시 1556년연표보기 - 이국주 사망
출생지 이국주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묘소|단소 이국주 묘소 -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지현리 산5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연안(延安)
대표 관직 이천 현감

[정의]

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복경(攴卿). 아버지는 통훈대부 지제교를 지낸 이세범(李世範)이다. 아들은 의정부 좌찬성 이호민(李好閔), 대사헌 이우민(李友閔)이다.

[활동 사항]

이국주(李國柱)[1487~1556]는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영특하여 학문에 열중하였다. 1525년(중종 20)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상사생(上舍生)이 된 뒤 조예가 더욱 깊어져 모범적인 행동으로 동료들을 감복시켰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해 실패하였으나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성품이 준엄하고 결백하였으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항상 온화하였고, 자신을 검속할 때는 세심하였으나 다른 사람을 책망할 때는 간략히 하였다.

효성을 다해 양모를 모시고 뜻을 거스르지 않아 환심과 사랑을 얻었고, 친척들은 친소를 따지지 않고 똑같이 대하였다. 가까이서 방문한 사람이나 멀리서 여행해 온 사람을 막론하고 “쉬어 가게.” 하고 음식을 접대하였으므로 해마다 들어오는 수입은 넉넉하였지만 항상 쪼들렸다. 비명횡사한 친척이 있으면 분개하여 먹지도 않고 관청에 소송한 뒤에야 그쳤으나, 간혹 이치에 맞지 않는 일로 자신을 가해한 자에게는 따지지를 않았다. 어떤 사람이 “너무 재물을 낭비하고 가계를 돌보지 않는다.”고 하자, “일가친척과 나는 모두 한 사람의 몸에서 나왔다. 가난해 먹을 것이 없는 친척이 있으면 차라리 내 것을 주고 같이 굶고 같이 먹어야 마음이 편하다. 내가 어찌 명예 때문에 그러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 또한 인근의 부랑자들에게도 빠짐없이 베풀었다.

당시의 권력자가 이국주의 행의(行誼)를 높이 평가하여 의장고 낭청에 천거하여 오랫동안 재직하였다. 그 후 제용감 주부로 승진하였다가 종부시로 옮긴 뒤 사축서와 조지서로 옮겼다. 이들 관직은 모두 한직으로서 우대한 것이었다. 나중에는 외직으로 나가 이천 현감이 되었다. 평소 앓고 있던 지병이 조금 차도가 보이자 친구들이 “산중 고을은 업무가 간편해 휴양하기 좋다.”고들 하였으나 아무리 병중이라도 국록을 거저먹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업무를 폐하지 않았다. 좌우에서 적극 말렸으나 듣지 않아 끝내 병세가 더욱 악화하여 영영 일어나지 못하였다.

[묘소]

묘는 1557년(명종 12) 2월 경기도 양주의 천마산 언덕에 안장하였다가 이듬해 경기도 포천시 화현면 지현리 산5번지에 있는 현재의 장소로 반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아들 이호민이 부원군에 봉해졌을 때 연선 부원군(延善府院君)의 작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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