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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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養心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준호 |
출생 시기/일시 | 1725년 - 김양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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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47년 - 김양심 춘당 대정시 급제 후 승정원 가주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50년 - 김양심 의정부 사록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56년 - 김양심 낙안 군수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69년 - 김양심 장령 제수(1769년) |
활동 시기/일시 | 1771년 - 김양심 용양위 부호군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72년 - 김양심 통례원 우통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73년 - 김양심 전라 도사 겸 해운판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74년 - 김양심 사간원 사간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74년 - 김양심 장령 제수(1774년) |
몰년 시기/일시 | 1777년 - 김양심 사망 |
활동 시기/일시 | 1747년 7월 - 김양심 승문원 부정자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47년 9월 - 김양심 휘릉 별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55년 7월 - 김양심 성균관 전적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55년 8월 - 김양심 병조좌랑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55년 11월 - 김양심 존숭도감 낭청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60년 4월 - 김양심 사헌부 지평 제수(1760년) |
활동 시기/일시 | 1760년 10월 - 김양심 통례원 상례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62년 5월 - 김양심 사헌부 지평 제수(1762년) |
활동 시기/일시 | 1762년 7월 - 김양심 사헌부 장령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63년 7월 - 김양심 영해 부사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770년 4월 - 김양심 장령 제수(1770년) |
활동 시기/일시 | 1770년 9월 - 김양심 종부 시정·춘추관 편수관 겸직 |
활동 시기/일시 | 1774년 11월 - 김양심 중경 회시 감시관·첨지중추부사 제수 |
1775년 1월 - 김양심 승지 제수 | |
묘소|단소 | 김양심 묘소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조가동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안산(安山) |
대표 관직 | 사헌부 장령 |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 묘가 있는 조선 후기 문신.
[가계]
본관은 안산(安山). 자는 경인(敬仁), 호는 과욕재(寡慾齋). 아버지는 김상성(金相星)이다.
[활동 사항]
김양심(金陽心)[1725~1777]은 화양사(華陽寺)에서 수학하였다. 1747년(영조 23) 봄에 실시한 춘당 대정시(春塘臺庭試)에서 급제하여 바로 승정원 가주서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승문원으로 옮겨 부정자를 제수 받았으며, 9월에는 휘릉 별검에 임명되어 가주서를 겸직하였다. 1750년(영조 26) 의정부 사록을 제수 받았다. 1755년(영조 31) 7월 성균관 전적, 8월 병조 좌랑을 거쳐 11월 존숭도감 낭청이 되었다. 다음 해 춘추관 의사관을 겸임하다가 낙안 군수로 부임하였다.
1760년(영조 36) 4월 사헌부 지평으로 임명되었으나 한 달 뒤에 사직하였고, 10월에 통례원 상례가 되었다. 1762년(영조 38) 5월 다시 사헌부 지평이 되어 대사헌 이규채(李奎采), 사간 송덕중(宋德中) 등과 함께 삼사에서 합사하여 조재호(趙載浩)를 조사하여 처단하기를 청하였다. 그 후 부사과(副司果)로 옮겼으며, 7월에 다시 사헌부 장령으로 돌아갔다. 장령으로 있으면서도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며, 또 ‘황경원(黃景源)이 성균관 대사성이 되어 과시(課試)가 공평치 못하므로 문임(文任)의 천망(薦望)에서 뽑아 버리기’를 계청하다가 오히려 파직되었으며, 아울러 대간의 망(望)에서 영구히 지워지게 되었다.
1763년(영조 39) 7월 영해 부사가 되었으며, 1769년(영조 45) 다시 장령을 제수 받았으나, 수령의 서경(署經) 때문에 여러 대간을 잇달아 재촉하며 나오라 요구하였을 때 나오지 않아 오히려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삭직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4월 장령으로 다시 임명되었으며, 9월에 종부 시정, 춘추관 편수관을 겸하였다. 1771년(영조 47) 용양위 부호군으로 옮겼다가, 다음 해 다시 통례원으로 돌아가 우통례 직책을 맡았다.
1773년(영조 49) 전라 도사 겸 해운판관이 되었으며, 다음 해 정월 장령으로 복직하였다가 사간원 헌납으로 자리를 옮겼다. 1774년(영조 50) 사간원 사간이 되어, 과거장에서 과시를 치르는 선비들이 오히려 사관을 꾸짖고 낭관(郎官)을 때리는 등 좋지 않음을 보고 임금에게 상소하니, 임금이 가납하고 시정하라 하였다. 11월에는 중경 회시에서 감시관이 되었다가, 왕의 특명으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며, 다음 해 정월에 특별히 승지를 제수하였다. 얼마 후 사간원 대사간으로 옮겼다가 다시 승정원 우승지가 되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조가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