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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815
한자 吉明里遺蹟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374-3
시대 고대/삼국 시대,조선/조선
집필자 김동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기/시대 삼국시대|조선시대 - 길명리 유적 조성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8년연표보기 - 길명리 유적 단국 대학교 사학과에서 지표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2년 3월 22일연표보기 - 길명리 유적 세종대학교 박물관에서 1차 시굴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2년 4월 9일연표보기 - 길명리 유적 세종대학교 박물관에서 1차 시굴조사 종료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2년 9월 16일연표보기 - 길명리 유적 세종대학교 박물관에서 2차 시굴조사 시작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2년 10월 20일연표보기 - 길명리 유적 세종대학교 박물관에서 2차 시굴조사 종료
소재지 길명리 유적 -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374~3·4지도보기
성격 유물 산포지
면적 약 600㎡

[정의]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에 있는 삼국 시대 집터와 조선 시대의 유물 산포지.

[위치]

길명리 유적(吉明里遺蹟)은 서고동저(西高東低)의 비교적 편평한 평지에 위치하며, 북쪽에 자리한 금주산의 남쪽 능선 끝부분에 있다. 포천을 지나 신철원으로 가는 국도 43호선을 따라 북쪽으로 가면 만세교가 있다. 이 만세교에서 동쪽으로 연결되어 일동면으로 이어지는 국도 37호선을 따라가면 왼쪽에 길명동이란 마을이 나온다. 길명리 유적은 이 마을을 지나 북쪽으로 가면 마을 끝부분에 위치한다. 주소지는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374번지, 3~4번지 일원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길명리 유적은 세종 대학교 박물관에서 시굴 발굴 조사하였다. 길명리 유적은 서울 지방 국토 관리청에서 건설한 일동~영중 간 도로 확장·포장 공사의 건설 예정 지역에 해당한다. 길명리 유적에 대한 조사는 1998년 단국 대학교 조사단에 의하여 처음 이루어졌는데, 지표에서 기와와 자기 조각이 찾아져 유물 산포지로 알려졌다. 그 이후 길명리 유적이 도로 건설 예정 구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밝혀져 유적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하여 2002년 3월 22일부터 4월 9일까지 시굴 조사가 이루어져 시굴 조사 결과 집터의 일부가 확인되어 발굴 조사를 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 조사 지역의 대부분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흐른 물의 영향이 많이 미쳤지만, 남서쪽 지역은 비교적 물의 영향을 덜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서쪽 지역은 일시적으로 물이 고였던 자리인 검은 층이 폭넓게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사 지역의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큰 바위가 곳곳에 흩어져 있다는 사실과 모래가 넓게 분포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바위는 주로 북동쪽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고, 모래는 대부분의 조사 지역에서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물의 영향이 비교적 약하였던 조사 지역의 남서쪽에서는 초기 철기 시대의 집터 1채와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3기의 불탄 유구(遺構)가 찾아졌다. 초기 철기 시대의 집터는 물에 의한 영향은 별로 없었지만 밭 경작 과정에서 집터의 벽면 일부가 파괴되었고, 불탄 유구는 물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어 건물 터의 일부로 파악되는 부분만 남아 있었다.

길명리 유적의 발굴 조사는 시굴 조사 때와 같이 일동~영중 간 도로 확장·포장 공사가 실시될 예정 지역의 제한된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발굴 조사는 시굴 조사 때 집터의 일부가 확인된 남서쪽 지역을 집중적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 지역은 터널 입구까지 땅을 파고 교량을 건설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지형 변경을 고려하여 전면적인 발굴 조사를 하였다.

조사 결과, 길명리 유적은 밭 경작과 물에 의한 지형 변화가 심하게 일어나 유구와 문화층이 상당 부분 파괴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남서쪽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파괴가 심하지 않았다. 특히 조사 지역의 전체에 걸쳐 홍수에 의한 지형의 변화가 심하게 일어난 것이 확인되었는데, 물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흘러간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고 북서쪽에는 일시적으로 물이 고여 있었던 자리가 있다. 집터의 층위 파악은 집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동서 방향으로 너비 30㎝의 둑을 설치하여 조사를 하였는데, 집터 유구와 같은 층위에서는 석기 및 많은 양의 경질(硬質) 민무늬 토기가 찾아졌다. 이것으로 볼 때 길명리 유적에는 오랜 기간 사람들이 터전을 잡고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토 유물]

길명리 유적의 집터는 부분적으로 파괴가 되었지만, 거의 완전한 형태의 1채가 조사되었다. 유적의 전체적인 상황은 파악할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 이 시기의 집터가 한곳에 여러 채 자리하고 있는 점에서 조사 지역의 주변에 또 다른 집터가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것 같다.

길명리 유적의 집터에서 찾아진 유물은 크게 석기와 토기, 흙으로 만든 토우(土偶) 그리고 대롱옥[管玉]이 있다. 석기는 집터의 동벽과 화덕 자리의 북쪽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종류는 돌끌과 갈판, 만들다가 만 덜된 석기 등으로 모두 4점이다. 이러한 석기들은 이 시기의 집터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것으로 특이한 점은 없는 것 같다. 토기는 경질 민무늬 토기와 타날문(打捺文) 토기가 찾아졌는데, 타날문 토기는 몸통 조각이 1점 발견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민무늬 토기이다.

민무늬 토기의 생김새는 길명리 집터에서 출토된 완형이거나 완형에 가까운 토기로 볼 때 입술이 바라진 단지가 가장 많은데, 이런 토기는 이 시기의 토기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흙으로 만들어진 토우는 회청색을 띠고 있는데 꼬리 부분이 없어 정확한 형상은 판단하기 어렵지만 전체적인 생김새로 보아 돼지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시기의 집터에서 발견된 토우 자료가 많지 않아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은 앞으로 다른 자료와 비교, 검토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현황]

약 600㎡인 길명리 유적은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여름철에 집중 호우가 오면 금주산의 계곡물에 의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발굴 과정에서 실제로 물에 의하여 운반된 큰 자갈돌이 지표 아래에서 무질서하게 드러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길명리 유적의 시굴·발굴 조사는 일동~영중 간 도로 건설 예정 지역에 해당하는 아주 제한된 범위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적의 성격을 살펴보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하지만 길명리 유적에서 조사된 초기 삼국 시대의 집터와 출토 유물은 포천을 비롯한 중부 내륙 지역의 이 시기 문화상(文化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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