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6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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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四禮訓蒙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성환 |
[정의]
1614년 포천 출신의 학자이자 문신인 이항복이 제의(祭儀)와 삼례(三禮)를 편성한 책.
[저자]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조선 중기 포천 출신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이다. 참찬 이몽량(李夢亮)의 아들이고, 권율(權慄)의 사위이다.
1580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예문관 검열을 지내고, 선조가 『강목(綱目)』 강연(講筵)에서 고문을 천거하라고 명하여 이이(李珥)에 의해 이덕형 등과 천거되어 한림에 올랐다. 1589년 예조정랑으로 역모 사건의 친국에 참여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을 처리한 공로로 평난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왕비를 개성까지 호위하고, 왕자를 평양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또 이덕형과 명나라에 원병을 청할 것을 건의하는 한편, 근왕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여 윤승훈(尹承勳)을 호남으로 보내 근왕병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후 병조판서·이조판서,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하여 안으로는 국사에 힘쓰고 밖으로는 명나라 사절의 접대를 전담하였다. 1598년 우의정 겸 영경연사·감춘추관사에 올랐고, 1600년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사,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고 다음해 호종 1등 공신에 녹훈되었다. 광해군 때 북인의 표적이 되어 1613년(광해군 5) 인재 천거를 잘못하였다는 구실로 공격을 받고 물러나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였다.
1602년 정인홍(鄭仁弘) 사건에서 성혼을 비호하고 나섰다가 정철의 편당으로 몰려 영의정에서 사퇴하였고, 광해군 때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의 살해 음모에 반대하다가 정인홍 일당의 공격을 받았다. 1617년 인목대비 김씨가 서궁(西宮)에 유폐되고, 왕비에서 폐위하자는 주장에 맞서다가 관작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편찬/간행 경위]
이항복이 1614년(광해군 6)에 짓고‚ 제자 김지남(金止男)이 전라 감사로 재직하던 1622년에 간행하였다. 또 손자 이시현의 주도로 1674년(현종 15) 중간되었다.
[형태/서지]
1책 86장의 목판본으로, 크기는 33.7×21.6㎝이다.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항복이 1614년에 지은 『사례훈몽(四禮訓蒙)』의 발문에 의하면, 『가례(家禮)』는 기본적으로 의절에 관한 책이어서 자칫 예의 본질인 정신을 등한시한 채 형식에만 얽매이게 되기 쉬워 매번 제사를 지닐 때마다 집안의 자제들이 어른들을 따라 예는 시행하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므로‚ 이런 폐단을 고치고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 고경(古經)의 제의(祭儀)를 채록하고 이를 이언적이 지은 『봉선잡의(奉先雜儀)』와 비교·검토한 후, 여기에 삼례(三禮)의 요어(要語)를 추록하여 저술하였다.
내용은 크게 관례·혼례·상례·제례의 4례로 나누고, 다시 관례는 8장, 혼례는 14장으로 변례(變禮)까지 밝히고 있다. 상례는 모두 110장인데, 총서(總敍) 35장, 초종(初終) 16장, 습(襲) 10장, 소대렴(小大歛) 7장, 성복(成服) 24장, 장(葬) 18장으로 나누어 초상부터 장사까지의 예를 논하고 있다. 제례는 50장으로, 제본(祭本) 6장, 제론(祭論) 14장, 재계(齋戒) 5장, 제의 4장, 강신(降神) 9장, 제진(祭鎭) 5장, 준(餕) 3장, 섭제(攝祭) 4장으로 나누어 제례에 관해 상세히 밝히고 있다.
[의의와 평가]
『사례훈몽』은 조선 중기 관혼상제에 대한 가례를 상세하게 정리하고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