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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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治道私議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근호 |
저술 시기/일시 | 1857년 6월 - 『치도사의』 저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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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논설 |
저자 | 김평묵 |
[정의]
1857년 포천 출신의 유학자 김평묵이 치도(治道)에 대한 입장을 정리한 글.
[개설]
『치도사의(治道私議)』는 조선 후기 포천에서 출생하고 세거하였던 김평묵(金平黙)[1819~1891]이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 글이다. 김평묵은 개항과 서양 문물의 침투를 거부하면서 도학(道學)의 입장에서 자신의 경세론(經世論)을 피력하였다. 김평묵의 문집인 『중암 문집(重庵文集)』 권34에 수록되었다.
[저자]
김평묵의 본관은 청풍이고, 자는 치장(穉章), 호는 중암(重庵)이다. 포천의 화산면 시우촌에서 출생했고, 스무 살 때에는 당시 포천 현감인 성근수(成近壽)의 권유로 포천 현학(縣學)에서 수학하였다. 20대에는 양근에서 이항로(李恒老)와 홍직필(洪直弼) 등에게 수학하였다. 이후 포천과 춘천, 가평 등지를 오가면서 생활하였고, 1876년(고종 13) 이후에는 외국과의 화약(和約)에 반대하는 척사론의 입장에서 상소를 제출하였고, 이로 인해 1881년(고종 18)에는 전라도 지도(智島)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스승인 이항로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아 실천한 화서학파의 대표적 인물이다.
[편찬/간행 경위]
『치도사의』는 당시 서양 문물이 침투하는 현실을 목격한 김평묵이 전통적인 유교의 입장에서 서양 문물의 문제점을 피력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한 글로, 1857년(철종 8) 6월에 저술되었다.
[구성/내용]
문답식으로 서술된 것이며, 모두 17개 조항으로 이루어졌다. 총설(總說)을 시작으로 「논정군(論正君)」·「논경연(論經筵)」·「논붕당(論朋黨)」·「논청사로(論淸仕路)」·「논과거(論科擧)」·「논구임(論久任)」·「논분사민(論分四民)」·「논강사(論強仕)」·「논증관록정리요(論增官祿定吏饒)」·「논이주남초잡색기희미비지금(論飴酒南草雜色技嬉糜費之禁)」·「논제민지산(論制民之產)」·「논우금잉급판방지설(論牛禁仍及板房之設)」·「논환폐(論還弊)」·「논양사힐융등사(論養士詰戎等事)」·「논반경식사(論反經息邪)」 등과 주제가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후설(後說)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치도사의』에서 김평묵은 치도(治道)의 근본은 임금의 마음을 바로 잡는 것이라 전제한 뒤 당파와 문벌에 구애되지 않는 인재 등용을 비롯해 오랜 동안 관리에게 직무를 맡길 것 등과 녹봉을 넉넉하게 주어 선비를 권장할 것 등을 제시하였다. 이밖에 경제적으로는 민생 대책을 강구할 것과 소의 도살 금지, 환곡 제도 폐단의 개선 등을 아울러 제시하였다. 특히 「논반경식사」조에서는 서양 문물의 침투와 외국과의 통상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시하였다.
[의의와 평가]
『치도사의』에서 김평묵은 개항과 서양 문물의 침투에 대해 우려를 표시하면서 유교적인 도학의 입장에서 시무론(時務論)을 피력하였다. 이 점에서 『치도사의』는 위정척사적인 입장에서의 경세론을 해명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