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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558
한자 獨立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계형

[정의]

구한말~일제 강점기 경기도 포천 지역의 독립운동.

[개설]

경기도 포천지역은 구한말부터 의병 운동의 중심지로서 항일 의식이 남다른 곳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도 독립 운동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의병, 대동 청년단, 대한 광복회, 3·1 운동, 대한 독립단, 주비단, 의열단, 한국 독립당, 광복군 등의 계열에서 경기도 포천 지역 출신 독립 운동가가 지속적으로 배출되었다. 먼저 의병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최익현(崔益鉉)이 경기도 포천 출신이었다는 점이 큰 영향을 미쳐 의병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의병 운동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이은찬(李殷瓚)·연기우(延基羽)·강기동(姜基東)·김연성(金演性) 등이 의병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는데, 여기에 경기도 포천 출신들이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1909년 9월 이후 2개월에 걸쳐 일제가 의병에 대한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했지만,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는 1911년까지 20~30명 규모의 의병들이 산악 지대를 근거지로 끈질긴 항전을 계속하였다.

1910년 8월 국권 피탈 이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대한 광복회 등의 비밀 결사를 통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최익현의 손자 최면식(崔勉植)이 군자금 모급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외에도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유사 종교 단체가 조직되었는데, 이종학(李鐘學)·정태순(鄭泰舜) 등은 청림교(靑林敎)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도 포천에 설립된 근대 교육 기관인 개성 한영 서원(韓英書院)의 지교는 총독부가 사용 금지령을 내린 『초등 본국 역사』를 통해 한국사를 가르치고 『애국 창가집』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일제 강점기 경기도 포천 지역에 세워진 80여 개에 달하는 서당에서는 민족 교육이 실시되었다. 이러한 기반에서 1919년 3월 13일 포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의 주도하에 3·1 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경기도 포천지역의 3·1 운동은 3월 24일 이후 영중면 영평리소흘면 송우리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군청 사무소와 영평 헌병 분견소를 공격하였고, 3월 29일 소흘면 무봉리군내면 유교리 만세 시위에 이어 다음 날인 3월 30일에는 가장 큰 크고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일동면·이동면·영중면 주민 2,000여 명이 신북면사무소 앞에 모여 집회를 갖고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것이다. 당시 헌병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여러 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이어 4월 1일에는 일동면과 기산면에서, 4월 3일에는 일동면 장암리·노곡리신북면 삼정리 등지에서, 그리고 4월 4일에는 영북면 자일리에서 시위운동이 기도되었다.

1920년대에는 포천 청년회(抱川靑年會), 포천 산업 청년회(抱川産業靑年會), 송우 청년단(松隅靑年團) 등의 청년 단체가 조직되었는데 이들의 주도하에 야학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포천 노동 야학(抱川勞動夜學)·양문 노동 야학(梁文勞動夜學)·유정 노동 야학(楡亭勞動夜學)·갈월리 동기 야학(冬期夜學)·갈기 노동 야학·용정 노동 야학(龍井勞動夜學) 등이었다.

1920~1930년대에는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도 타 지역과 같이 식민지 지주에 대항하는 소작 농민들의 격렬한 저항이 소작 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경기도 포천 지역의 소작 쟁의는 1930년대의 경우 규모가 큰 건수만 따져도 1934년에 6건, 1935년에는 50건, 1936년에는 35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경기도 포천 지역에는 일본인 지주나 농장에 소속된 소작 농가가 적지 않았고 조선인이 경영한 농장 및 농업 회사는 없었다. 또한 경기도 포천의 심곡 수리 조합영북 수리 조합 지역에서는 주민들의 수리 조합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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