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0005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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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韓靑年團抱川郡團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경기도 포천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도형 |
[정의]
1948년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설립된 대한청년단 소속 지부.
[개설]
대한 청년단은 8·15 해방 이후 국내 지지 기반이 필요했던 이승만(李承晩)에 의해 1948년 12월 19일 우익 청년 단체인 대동 청년단을 중심으로 청년 조선 총동맹·국민회 청년단·대한 독립 청년단·서북 청년회 등 전국 20여 개의 청년 단체를 통합하여 결성되었다. 이어 각 지역별 단부가 세워졌는데, 대한 청년단 포천군 단부는 1949년 3월 25일 설립되었다.
[설립 목적]
대한 청년단은 200만 단원을 확보하여 전국적인 조직 체계를 갖추고, 문화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향토방위를 위한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등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 청년단 포천군 단부도 이러한 목적을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1949년 1월 20일 이범석(李範奭)이 이끌던 민족 청년단이 합류하였으나 지청천(池靑天)의 대동 청년단과 이범석의 민족 청년단이 족청과 비족청으로 분열되었다. 1950년 1월에는 최고 위원회제를 폐지하고 단장제로 바꾸었으며, 신성모(申性模)가 초대 단장이 되었다. 이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청년 방위대를 조직하고 청년단원을 향토방위에 투입하였다.
1950년 12월에는 「국민 방위군 설치령」에 따라 국민 방위군으로 개편되어 만 17세~40세의 단원이 제2 국민병에 소집되었으며, 국민 방위군을 조직하고 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1951년 1월 국민 방위군 사건으로 방위군이 해산되고 5명의 주요 간부가 처형되면서 활동이 침체되었다. 이후 재건을 꾀하였으나, 1952년 8월 제2대 대통령 선거 이후 내분이 심해지자, 1953년 9월 10일 해체되어 민병대에 편입되었다. 대한 청년단 포천군 단부의 변천도 중앙 단부와 궤적을 같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한 청년단 포천군 단부는 주로 지역 기반 시설 마련 [“포천군 신읍리에 시민회당이 없어 대한 청년단 포천군 단부에서 주관하여 예산 150원으로 회당을 신축할 계획을 세웠다”: 『동아 일보』 1949년 4월 21일자], 자금 조달을 위한 도(道) 복표(福票) 발행[“복표를 발행하여 100만 원에 상당하는 예산을 마련하였으나 1950년 5월에도 공사가 시작되지 못하였다”: 『동아 일보』 1950년 5월 7일자], 각 면 단부 훈련 책임자 합숙 교련[“대한 청년단 포천군 단부에서는 각 면 단부 훈련 책임자 합숙 교련을 1949년 4월 26일부터 5월 4일까지 1주일간 포천 운동장에서 실시하였다”: 『동아 일보』 1949년 4월 28일자] 등에 관한 사업과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국지적인 교전이 발생하여 단원이 사망[“5월 4일 북한군과의 국지 교전으로 포천군 영중면 단부 단원 박창석(朴昌石)이 총상을 입어 절명하였다”: 『동아 일보』 1949년 5월 14일자]하기도 하고, 창립 1주년 기념식을 거행[“대한 청년단 포천군 단부 1주년 기념식이 1950년 3월 25일 포천 중학교에서 김윤근(金潤根) 부단장, 박경구(朴經九) 도단장, 서정희(徐廷禧) 국회 의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동아 일보』 1950년 3월 25일자]하기도 하였다
[현황]
대한 청년단의 총재로는 이승만, 최고 위원으로는 장택상(張澤相)·지청천·전진한(錢鎭漢)·노태준(盧泰俊)·서상천(徐相天)·유진산(柳珍山)·강낙원(姜樂遠)·신성모 등이 추대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한 청년단은 해방 이후 남한 지역 내에서 우익 청년 단체를 통합하여 조직된 통일 조직이었으나 청년 단체로서의 역할보다는 주로 이승만을 지원하는 정치 활동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