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13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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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若無湖南是無國家護國魂-右水營- |
영어공식명칭 | Usuyoung Village of Honor of Safeguarding the Nation, What the Nation is being if without the Honam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변남주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서상리, 동외리 일대의 호국혼이 담긴 우수영마을 이야기.
[우수영문화마을 “전라우수영 이야기를 품다”]
우수영의 지명은 조선시대에 설치된 수군진 ‘전라우수영’에서 유래하고, 문내면(門內面)의 지명은 전라우수영의 외성(外城)으로 원문(轅門)의 안쪽에 위치한 데서 유래한다. 우수영은 한반도의 서남단 모서리, 즉 남해와 서해가 만나는 지점, 화원반도의 중앙에 있다. 화원반도의 남쪽은 명량해협을 사이에 두고 문내면 학동리와 진도군 군내면과 마주하였으나 1984년 연륙교가 건설되었다. 화원반도의 북쪽은 화원 땅끝 대진수로를 사이에 두고 목포와, 동쪽은 영암군과 마주한다. 현재는 1994년 개통된 금호~영암방조제를 통하여 서로 왕래한다. 우수영은 해남군 문내면에 속하는 10개 자연마을의 통칭이다. 속칭 시옹, 시영, 우시영이라고도 칭한다. 우수영은 법정리 3개로 구성된다. 즉, 선두리[선두, 남상, 남하, 남외], 서상리[서상, 서하, 서외], 동외리[동내, 동외, 동영]가 그것이다.
우수영항을 지나면 2015년부터 공공 미술 프로젝트가 진행된 우수영문화마을의 모습이 드러난다. 우수영문화마을 조성 과정과 마을의 이야기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아카이브관이 있고, 인근에는 법정스님 생가터가 있다. 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면 100여 년 역사의 제일여관을 리모델링한 정재카페와 여러 작가들의 다양한 벽화, 예술 작품 등을 관람할 수 있다. 특히 주민들이 살고 있는 공간 속에서 옛 이야기와 예술이 공존하고 있는 점이 우수영 현재의 매력이다.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만약에 호남이 없었다면 국가가 있었겠는가]의 중심, 세종 때 발원했다]
우수영은 조선시대 수군진의 역사와 밀접하며 관련한 역사문화가 풍부하다. 우수영에는 455년 동안 서남해 지역 해안 방어를 관장하던 수군사령부가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우수영은 우리나라 4대 수영 중 하나였고, 이칭 연영(蓮營)으로도 불리었다. 우수영 앞바다는 물살이 빠른 명량해협을 이루고 있고, 그 안쪽은 양도(洋島)라는 섬이 울돌목의 거센 파도를 막아 주는 방파제 역할을 한다. 1432년 당시 전라수영은 지금의 목포시 용당동 당곶[唐串]에 있었다. 당곶은 구 목포상고 정문 인근이다. 목포는 영산강 초입에 있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기에는 용이하나 남해에 출몰하는 왜구의 토벌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종은 이각(李恪)[1374~1446]을 보내어 조사하게 한 후, 1440년(세종 22) 전라수영을 황원곶 우수영으로 이설하라고 명하였다. 세종도 해로의 요충지 우수영을 특별히 주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초대 전라수영처치사로는 무안 출신 윤득홍을 파견하였다. 윤득홍은 해안가에서 태어나 바다를 잘 알고 배를 잘 모는 것이 유일한 재주였다고 한다. 왜구 토벌, 전라도 조운 등으로 세종의 신임을 얻어 종 2품까지 올랐는데, 장영실과 함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러다가 1479년(성종 10)에 전라도 순천부(順天府) 내례포(內禮浦), 즉 지금의 전남 여수에 전라좌수영이 분설되면서 전라우수영으로 개편되었다. 우수영은 정유재란 때에 세계적인 해전으로 평가받고 있는 명량대첩의 배후기지로 이용되었다.
우수영에는 정3품 당상관인 전라우수사가 배치되었다. 종 6품 해남현감보다 6단계 위의 계급이다. 우수사의 약칭은 수사(水使)이며, 별칭은 곤수(梱帥)라 하기도 하였다. 우수사의 위상은 대단하였다. 우선 당상관(堂上官)으로 조정에서 정사를 볼 때 대청[堂] 위의 의자에 앉을 수 있으며, 왕과도 정치 중대사를 논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고급관료이다. 당상관 곤수는 ‘대궐 밖의 신하’라는 뜻으로 ‘대궐 밖의 모든 일을 맡는 장군’을 말한다. 전쟁 시에는 생살권까지 임금으로부터 위임받아 막강한 군령을 휘두른다. 전라우수사는 밑에는 우후 1명[종3품], 첨절제사[종3품], 여러 만호[정4품] 그리고 병선은 130여 척을 거느렸다. 전라우수사의 역할은 전라우도의 방어 외 25처의 봉화, 목장관리, 세곡의 수납과 호송, 소나무밭 관리와 전선의 건조 등으로 임무가 막중하였다. 조선 후기에 전라우수영은 속읍으로 7관[해남, 진도, 영암, 나주, 무안, 함평, 영광]과 수군진은 17포[완도 가리포~전북 옥구·군산진]를 거느렸으며, 전라우수사는 이에 속한 수군을 통솔하였다. 반면 전라좌수영은 5관 5포에 불과하였다.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의하면, 조선 후기 전라우수영에 소속되어 근무하는 자는 사령관격인 정3품 전라우수사 외 5,544명이고, 우수사의 관할에 편성된 전라우도 수군은 총 2만 5000명에 이르렀다. 19세기 중엽에는 전라우수영에 소속된 병선은 모두 85척에, 병사는 2만 1356명이었던 반면에 전라좌수영은 9,849명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역사를 등에 업은 우수영 사람들은 최근까지 이를 상당한 긍지로 여기고 해남읍을 하대하는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우수영은 서남해의 중심 도시였다. 전라도 군현 각종 고지도에는 전라우수영과의 거리를 필히 명기할 정도였다. 그 면모는 인구에서도 알 수 있다. 1759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해남현 전체 16면의 총 인구는 1만 9173명인데 이중 우수영이 포함된 황일면의 인구는 4,810명이었으나 지금 해남읍이 포함된 현내일면은 1,068명에 불과하였다. 이어 1789에 발간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도 알 수 있다. 해남 전체 16면 1만 8897명 중 우수영이 속한 황일면은 1,371호에 3,895명이었으나 해남읍이 포함된 현일면은 427호에 1,361명에 불과했다. 인구로만 따져도 해남읍은 우수영의 약 1/3~1/4에 불과하였다. 1895년 당시 우수영 소재지 민호는 560호였는데 목포(시)는 132호에 불과하였으니 우수영의 당시 위세를 짐작할 만하다.
전라우도의 연안과 섬에 설치된 각 수군진의 관할권이 우수영 수사에 있었다. 서남해 섬 지역을 왕래하는 나룻배도 24척이 우수영 포구에 있었다. 서남 해안 도서 지역민들의 가계를 살펴보면 낙향조의 상당수가 해남 우수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섬 지역의 문화와 우수영의 문화의 유사성은 우수영을 중심으로 활발한 왕래를 짐작하게 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895년 행정구역을 전국적으로 재편하게 되는데 이때 전라우수영도 철폐되었다. 수영의 폐지로 우수영은 군사상·행정상의 중요성도 상실되었다.
[서남해 섬을 아우르는 옥산군 설치 “우리는 싫어요”]
전라우수영이 혁파되자 1897년 8월 전라우수영 출신 관리들은 한양으로 올라가 1896년에 신설된 지도군[신안군 전신]을 폐쇄하고, 우수영에다 진도군 등 신안의 섬을 아우르는 새로운 군을 설치하고자 정부에 건의하였다. 군명은 옥산군(玉山郡)으로 하고, 관청 건물은 옥매산에서 나무를 베어와 짓되 경비는 제주도민을 비롯한 관할 지역 백성들에게 걷어서 마련한다는 계획이었다. 『독립신문』 1897년 8월 12일자 기사에 의하면, 전라도 해남 우수영 영리 출신 이태희, 안계민 등 오륙 명이 서울로 올라가 지도군을 우수영으로 옮긴다고 하자 우수영 거민은 우수영에 지도군을 설치하면 백성들을 우수영이 폐지되기 전보다 더욱 못살게 할 것이라 것이 반대한다는 요지였다. 이어 반대하는 우수영 주민들은 몇 사람을 대표로 선정하여 한양으로 직접 올라가 일을 보도록 하였다. 주민들은 『황성신문(皇城新聞)』에 1903년 7월 28~7월 31일까지 연속 3일간 반대 광고로 맞대응하였다. 결국 옥산군의 설치는 무위가 되었고, 더불어 우수영이 서남해 섬 지역을 아우르는 중심 도시로 재도약할 기회도 상실했다.
일제강점기 들어 우수영은 수탈의 전초기지로 전환되었다. 우수영 관아 남쪽에 조선흥업주식회사의 우수영사무실이 개소되었다. 그리고 우수영에 속하였던 많은 국유지와 미등록 토지의 대부분은 일본인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며, 우수영 사람들은 대부분 소작인으로 전락하였다. 밭에서는 보리와 목화 등 잡곡을 생산하였고, 논에서는 쌀과 이모작으로 보리가 생산되었다. 소작으로 생산된 목화와 쌀 등은 바다를 매립하여 조성된 태평정 광장에서 흥업회사의 공매를 거쳐 목포항으로 운반되었다.
[궁핍함 속에서도 문화예술을 꽃피웠다]
우수영 사람들은 궁핍함 속에서도 멋을 알고 즐기며 살았다. 우수영청년회는 1925년 7월 5~6일 태평정 광장에서 전남축구대회를 개최하였다. 대보름에는 남자들은 전라우수영 용잽이놀이를 하였고, 중추절 전후 3달간 보름달이 뜨는 3일간을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득 모여 강강술래를 밤새 하였다고 한다. 당시 여자들은 밤에는 문밖을 나가지 못하게 했는데, 보름에는 나가 노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3일을 놀고 나면 나가놀라고 해도 태옹이 나서 문턱을 못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춤을 배우려는 여성, 그리고 소리를 배우려는 세칭 한량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우수영에는 소리꾼, 풍물꾼들이 수십 명에 이르렀고, 자체적으로 태평정 광장에서 소리대회를 열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경복궁에서 명량대첩비를 찾아와 경비 마련을 위하여 농악단을 조직하여 풍물을 치며 섬을 순회하였다고 한다.
우수영 외처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즐기기를 좋아하는 풍토의 우수영에 드나들면서 살림을 거덜 낸 사람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게다가 거물급 우리나라 명창들이 10대 후반에 우수영을 드나들었고 혼외자까지 있다는 설이 파다하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수영에서는 다양한 전통 민속예술이 가꾸어졌다. 1950년대 제중의원을 운영하던 김범진은 끼가 있는 처녀들 30여 명으로 강강술래단[단장 정채옥 동외마을, 설소리 김금자, 받는소리 이옥자·윤경자]을 만들어 목포, 광주, 서울 등에서 공연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65년 강강술래가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고 이어 1966년에는 김길임과 김금자가 강강술래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여기에 김범진의 공이 절대적이었다고 김금자나 사위인 김병용 등 어른들은 기억하고 있다.
우수영에는 논보다도 밭이 많아 여자들의 일이 많은 곳이다. 따라서 여자들은 자연스럽게 밭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래가 발달하였다. 동외리 최이순은 “어머니와 같이 노래를 잘하는 여자는 인기가 있었으며 품앗이를 서로 하려고 하였다.”라고 한다. 「우수영부녀농요」는 지춘상 교수가 다듬어 1987년 8월 25일에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게 하였다.
남자들의 민속예술도 최근 복원되었다. 2012년에 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변남주·이윤선 교수의 주도 아래 집단놀이인 전라우수영 용잽이놀이가 70여 년 만에 복원되었고 이어 2013년에는 남자농요인 「우수영 들소리」가 45년 만에 복원되었다. 전거의 용잽이놀이는 남성들의 대보름놀이로 정착하였는데, 용놀이, 고싸움, 줄싸움에다가 줄소리와 걸궁이 더해진 형식이다. 해방 전까지 거의 매년 대보름에 행하여졌다고 하나 그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전라우수영 용잽이놀이에서 고싸움은 거칠어 남자만 하였으나 줄싸움은 남녀 구분 없이 참여하였고, 억세게 경쟁하였지만 해학적으로 즐기면서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였던 대동놀이였다.
「우수영 들소리」는 1960년대까지 우수영 남자들이 힘든 논농사를 지으면서 불렀던 농요이다. 「우수영 들소리」는 1968년 박덕신 등 4명이 부르고 권오성 교수가 녹음하였다. 그 구성은 모를 뜨면서 부르는 「먼데소리」, 「모내기」[상사소리 2종류], 「김매기」[절로소리 3종류], 풍년을 빌면서 하는 「방아타령」, 「도리깨질소리」 그리고 마지막 김매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머슴 중에서 일을 제일 잘한 상머슴을 소에 태우고 농악에 맞추어 춤추면서 부르는 「길꼬내기」 등이다. 2013년 복원된 「우수영 들소리」는 박귀만 회장을 비롯한 우수영 어른들이 5년간 매주 1회 이병채 지도를 받아 연습하였다. 그리고 2018년 9월 전남민속예술경연대회에 출전하여 대상을 수상하고 전국 대회 출전 자격을 획득하였다.
[땀 흘리는 신령한 명량대첩비를 찾아라]
우수영 동외리에 세워진 해남 명량대첩비는 1597년(선조 30) 9월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133척의 왜적함대를 12척의 전선으로 크게 무찌른 대첩을 기념하는 내용의 비다. 비문은 1686년(숙종 12) 써졌으나 2년 뒤인 1688년 3월 당시 전라우도수군절도사 박신주에 의해 세워진 해남 명량대첩비는 1969년 6월 16일 보물 제503호로 지정됐다. 비문의 주요 내용은 이순신이 재기한 직후 큰 기적을 올린 충무공의 업적을 칭송하면서 “충무공의 용병과 지리(地利)에 뛰어남은 귀신도 감동케 했고, 또 공의 난을 당해 적을 토벌함에 있어 책략을 결정함이 특출함은 옛 명장들도 이에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충의의 분발은 해와 달을 꿰뚫는다.”라고 기록하였다.
해남 명량대첩비는 국난이 있을 때마다 땀을 흘리어 민족의 앞날을 예고하였다는 전설 같은 사실을 간직하고 있다. 한일합병 이전, 일제강점기 해방 전, 6·25전쟁 직전, 광주민주화운동 전 등에 다수 목격자의 제보에 의하면, 글자 사이사이에서 물이 나와 줄줄 흘렀다고 한다. 그러면 지역 유지들이 새 광목을 여러 필 떠 와서 비 하부에 받치고 교대로 물을 짜내었다고 한다. 난대리 변국연[1918년 생]도 보통학교 시절 비가 땀을 흘린다고 하여 한걸음에 달리어 구경갔더니 광목으로 땀을 닦고 있던 어른들이 “이놈들아 절해라.”라고 하여 엉겁결에 큰절을 하였다고 한다. 또 일제강점기 우수영에 파견된 일본의 관리는 병이나 무자식, 사고 등 좋지 않은 일을 당하여 우수영을 기피하였다고 한다.
한편 일제는 대동아전쟁을 앞두고 봉안정을 우수영보통학교 운동장 서쪽에 건립하고 의식을 거행하였다. 또 1942년에는 망해산성 아래 관서재가 있던 산중턱에다 신사도 건립하였다. 그리고 우수영보통학교 학생들을 데려가 1942년 5월 27일 교기 입혼식(校旗入魂式)을 거행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일제가 해남 명량대첩비를 가만히 놔두었을 리가 없다. 전거의 왜신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된다하여 일제는 1942년 5월 전남경찰 부장인 아베[阿部]에게 철거를 명령했다. 3명의 경찰관이 10명의 인부를 데리고 와서 철거를 시도하였으나 일손이 더 필요하여 주민의 협조를 구하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협조하지 않았다. 다급해진 그들은 서하리에 사는 목수 김 모, 이 모를 강제로 데려다가 간신히 작업을 마쳤다. 선두리 선창에서 풍선배에 비를 실고 떠난 후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3년 후에 우리나라는 해방이 되었다.
우수영 주민들은 대첩비를 찾으려 혈안이 되었다. 이명귀, 홍중홍, 전시열, 김대한이 앞장을 섰다. 해남 명량대첩비의 행방을 찾던 중 그 비가 경복궁 뜰에 묻혀 있다는 연락을 받고 지역 유지들이 상경하여 확인하였다. 지역 유지들은 중지를 모은 끝에 미 군정청의 도움을 받아 기차로 목포까지, 돛단배로 선두리 선창으로 옮긴 후 우수영 영창에 임시 보관하였다. 신비한 일은 6·25전쟁 전까지 영창에 눕혀 보관하였을 때도 땀을 흘렸다 한다. 우수영 사람들은 비각 건립을 위하여 복구기성회와 걸궁패를 조직하여 목포, 신안, 영광 등을 순회하면서 대첩비의 탁본을 판매거나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호남신문사 이은상은 전라도민의 성금 모집에 앞장섰다. 1950년 3월 15일 남장대였던 충무리 충무사에 안치하고, 김은호 화백이 그린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를 모시게 되었다.
이후 1975년 성역화를 위한 조경 사업을 시작해 충무공 탄신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고, 매년 4월 28일 제향하고 있다. 그러다가 문내발전협의회는 2006년 국도 제18호선 확장 및 고가화로 인한 경관 및 참배 분위기 저해 사유로 들면서 울돌목 이전을 주장하며 중앙에 건의하였다. 하지만 2009년 문화재청은 원위치로 조건부 허가를 하였다. 따라서 2010년 10월 원 설립지 이전 정비 사업이 발주되었다. 이어 2011년 3월 17일 현재의 장소인 옛 동문 밖 비각으로 이전이 완료되었다.
["만세만세" 우수영의 독립만세 운동]
1920년 우수영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있기 1년 전인 1919년 4월 8일 목포 독립 만세 운동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이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여학생 14명 중 주윤애(朱允愛)[정명여학교 학생 19세, 이명 주유금(朱有今)]는 문내면 동외리 출신이다. 주윤애는 목포경찰서에 검거되어 1919년 11월 14일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우수영 독립 만세 운동은 주윤애가 징역 6개월 형을 마치고 석방되는 시기와 일치한다. 주윤애가 직접 관련은 아직 확인되지 않지만 이 분위기가 고향에 전달된 것은 분명하다.
일제강점기 우수영에서 독립 만세 운동은 보통학교 소년들이 먼저 포문을 열었다. 주도한 인물은 윤인섭(尹仁燮)[1900~1967]이며, 여기에 참여한 박기술(朴奇述)[1901년 1월 4일 생], 박용문(朴用文)[1901년 7월 24일 생], 전유봉(田酉峯), 임동수(林東秀), 최이규(崔伊奎), 박규성(朴圭星), 주봉옥(朱奉玉), 이준섭(李俊燮) 등은 모두 우수영보통학교 1회 학생들이다. 이들은 1920년 4월 21일 운동회를 마치고 저녁에 임동수의 집에서 모였다. 이 자리에서 윤인섭은 작년 3월 1일 이후 각지에서 모두 독립운동을 일으켰는데, 우리 우수영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켜 보자고 제의하니 여러 친구들이 흔쾌히 찬동하였다. 여기서 소년들은 자체의 맹약(盟約)을 굳건히 하는 의미에서 ‘독립 만세 지원자 성명표’를 만들어 각기 연명(連名)으로 무인(拇印)을 찍고, 22일 오후에는 동외리 성벽 밖에서 태극기 3개를 만들어서 윤인섭·전유봉·이준섭이 각각 한 개씩을 들고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며 우수영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도중에서 우수영보통학교 교사 장지훈(張志勳)·이우섭(李雨燮)에게 발견되어, 태극기는 빼앗기고 윤인섭·전유봉 등의 만세 행진은 제지당하고 모두 왜경에 체포되었다.
우수영 주민들의 독립 만세 운동은 다음날 발발하였다. 우수영 지역 유지 이상순(李尙順)[1888년 생]은 양성룡(梁成龍)·주영철(朱永澈)·김종호(金宗浩) 등과 중앙통 주재소에 찾아가 어린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에 분에 못이긴 지역민들은 만세 운동의 전개를 결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또 서울에서 잠시 내려와 있던 최원석(崔元錫)에게 부탁하여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강조하는 격문’을 만든 후에 청년들로 하여금 등사하게 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다음날 오후 7시경 선두리 선창가에 500여 명이 모였다. 이들은 태극기와 격문이 돌렸다. 그리고 남문에서 동문으로 향하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우수영주재소에서는 수백 명의 위세에 자체 병력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해남경찰서에 도움을 청했다. 해남경찰서에서 나온 왜경들은 시위대가 중앙통 주재소에 이르자 총칼을 휘둘렀다. 앞에 선 김종호가 든 깃대가 동강나며 태극기가 땅에 떨어지자 김종호는 다시 꺾어진 깃대를 주워 높이 들고 대한 독립 만세를 목청껏 외치니 군중들도 함께 환성을 올렸다. 왜경들도 더욱 칼을 휘두르고 총을 쏘니 대열은 차츰 무너지기 시작하였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이상순 등 주동자들은 떳떳하게 사실을 말하며 모든 것은 자기들이 주동한 것이라고 나서니 사태는 진정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만일에 대비하여 대다수의 무장대를 증파하고 또 경비정을 출동하여 위협 발포를 하는 등 비상경계를 펴기도 하였다. 지역민 이상순·양성룡·주영철·김종호와 학생들인 윤인섭·전유봉·최이규·주봉옥·임동수·박규성·이준섭 등은 뒤에 목포(木浦) 감옥에서 4개월 내지 1년간의 옥살이를 당하였다.
한편 당시 우수영보통학교 학적부를 살펴보니 1회 졸업생은 고작 10명에 불과했다. 전거의 인물 중 박기술과 박용문만 졸업대장에 등재되었다. 2회 졸업생 수 21명, 3회 33명, 4회 40명인 것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이로 보아 윤인섭 등은 1920년 4월 22일 독립 만세 운동 건으로 퇴학당한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