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300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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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今江里 |
영어공식명칭 | Geumgang-ri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금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문종안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금강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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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리 -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금강리 | |
성격 | 법정리 |
면적 | 4㎢ |
가구수 | 129가구 |
인구[남/여] | 239명 [남자 105명|여자 134명] |
[정의]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금강리(今江里)는 1789년에 편찬된 『호구총수(戶口總數)』에 금강(錦江)으로 기록되어 있다. 마을 앞 가공산[335m]이 옥녀가 비단을 짜는 옥녀직금(玉女織錦) 형국인데, 산의 오른편에 물레재, 바람재가 있어서 짠 비단을 펼쳐 놓은 곳이어서 비단 금(錦) 자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금(今) 자로 바뀌었다.
[형성 및 변천]
1906년(광무 10) 영암군 송지시면과 송지종면이 송지시종면으로 합하여 해남군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신동리, 월강리, 만수리를 병합하여 해남군 송지면 금강리로 개설되었다. 현재 금강마을, 월강마을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금강마을은 패총과 철기시대 유물로 보아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1925년 백포방조제 축조로 농경지가 조성되면서 사람들이 들어와 지금의 규모로 발전하였다. 현재 김해김씨를 비롯하여 밀양박씨, 동복오씨 등이 모여 살고 있다. 월강마을의 입향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백포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마을이었다.
[자연환경]
남쪽에 가공산(駕空山)이 우뚝 솟아 있고, 북쪽의 낮은 산들을 제외하면 농경지가 펼쳐져 있다. 북쪽 농경지 경계로 구산천(九山川)이 흐르고 있다.
[현황]
금강리(今江里)는 북쪽으로 현산면 초호리, 동쪽으로 현산면 월송리, 남쪽으로 해원리, 서쪽으로 군곡리와 접하고 있다. 2018년 10월 31일 현재 면적은 4㎢이며, 금강리, 월강리의 2개 행정리에 129가구, 239명[남자 105명, 여자 134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주 소득원은 쌀이다. 특작물은 마늘과 버섯을 재배하고 있다. 마을 중앙으로 국도 제77호선이 지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 금강패총(今江貝塚)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자녀만 다닐 수 있는 금강공립심상소학교가 설립되었는데, 광복 이후 금강국민학교로 바뀌었다가, 1995년 송지초등학교와 통합되면서 폐교되었다. 폐교된 금강초등학교 교문 주변의 밭둑에서 패각층을 확인할 수 있다. 초등학교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일부 훼손되었는데, 밭 주변에 패각과 토기편이 흩어져 있다. 유물은 경질 민무늬토기편이 수습되었다.
금강마을에서는 음력 1월 14일 저녁에 금강리 금강 도제를 지낸다. 마을 뒷산의 제각에서 당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을 입구의 솔대[솟대]에서 제사를 지내고, 마을회관 앞 삼거리에서 허수아비를 놓고 제사를 지낸 후 음식을 허수아비에 넣어 버린다. 월강마을에는 당제(堂祭)가 있다. 음력 1월 14일 밤 8시경에 마을 뒷산에 위치한 당집에서 당제를 지내며, 마을의 평안과 무사고를 기원한다. 제를 주관하는 제관은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고 2명을 선정한다. 제관들은 당집에서 지낸 후 마을에 있는 솔대에서 소지를 올린다. 이후 마을회관 앞에 마련된 거리제장에서 만들어진 허수아비를 앉혀 놓고 마을의 액을 가져가기를 기원한 후 마을 인근에 위치한 금강교 밑에 갖다 버리는 행위를 한다. 솔대는 과거에 2개가 있었으나 오래되어 없어지고 현재는 1개만 남아 있다. 마을에서는 솔대가 마을로 침입하는 재앙을 막아 준다고 믿고 있으며, 진대·남자장승과 여자장승으로도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