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1005 |
---|---|
한자 | 加里峯電子勞動爭議 |
영어음역 | Garibongjeonja Nodongjaengui |
영어의미역 | Garibongjeonja Labor Difficulti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구창환 |
성격 | 노동운동 |
---|---|
발생(시작)연도/일시 | 1985년 6월 24일 |
종결연도/일시 | 1985년 6월 29일 |
발생(시작)장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
관련인물/단체 | 대우어패럴 노동조합|효성물산 노동조합|가리봉전자 노동조합|선일섬유 노동조합 등 |
[정의]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던 가리봉전자에서 일어난 노동 운동.
[개설]
가리봉전자는 1983년 독산공장을 설립하고, 1984년 구로공장을 설립한 발광다이오드, 저항기 등의 전자 부품 생산 업체로서 자본금 26억8천2백만 원, 노동자 수 800여 명의 규모를 가진 업체였다.
[역사적 배경]
노동운동에 대해 탄압으로 일관하던 5공화국 정권은 1983년 말부터 정권이 안정권에 들자 노동운동에 대해 유화책을 폈다. 이에 노조 결성이 활발해지고, 노동운동단체도 늘어났다. 그러나 한편 1984년의 경제상황은 7.8%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외채이자 상환 과 더불어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수출 부진과 수입자유화 압력을 받고있었다. 이에 기업가들은 손실을 근로자들에게 전가하고자 했고, 자주적인 노조활동을 억압하려 하였다.
[발단]
가리봉전자의 노동 조건은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이 기본이었으며 작업 환경이나 기숙사 또한 열악한 상태였다. 특히 노동자들의 불만은 ‘비인격적 대우’에 집중되어 나타났다. 가리봉전자의 임금은 일당 3,870원으로 전자 업종 평균 임금 4,095원에 비해 낮은 상태였다.
저임금 문제는 근본적으로 정부의 임금 정책에 의해 구조화된 것이었지만, 임금 책정이 기업주에 의해 일방적이고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점과도 연관되었다. 한편 노동자들은 하루 8~10시간의 기본 노동과 평균 4~5시간의 연장 근로[잔업] 및 야간 노동[철야]과 특근을 수시로 했다.
현장에서는 관리자들의 욕설, 폭행, 희롱, 멸시가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제대로 이름을 부르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보통 “야”, “너” 등으로 부르며, “배우지 못한 지지리 못난 것들”, “구더기보다도 못한 것들”이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작업 환경 또한 열악하여 시너 냄새가 코를 찌르고, 현미경으로 정밀 작업을 하니 시력 감퇴, 두통 등이 빈번히 발생하였다. 유해 물질[납, 수지, 에폭시]을 다루는 곳은 피부병 알레르기가 발생할 정도로 열악하였다.
[경과]
1. 가리봉전자 노동조합 결성
가리봉전자 노동자 7명은 1984년 6월 7일 금속노동조합연맹[이하 ‘금속노련’]에서 노동조합[이하 ‘노조’] 결성에 관한 교육을 받고, 6월 8일 금속노련회관에 57명이 모여 노조를 결성하였다. 조합원들은 7월 8~14일 금속노련에서 노조 활동에 대해 배웠으며, 노조 결성 직후 조합원은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회사 측 관리자들은 노동자를 모아놓고 “노조는 도산, 노조는 빨갱이나 불순세력이 하는 짓, 회사를 망치려는 짓”이라고 선전하였다.
사장은 탈퇴원서를 쓰면 품질과로 보내주고 반장을 시켜준다고 회유하였다. 또 반장들 중심의 ‘한마음’이라는 반노조 조직을 만들어 노조가 하는 일을 대신하겠으니 노조가 필요 없다면서 노동자들의 분열을 조장하였다. 이러한 회사 측의 노조 탄압으로 조합원이 80여 명으로 줄었으나, 이들은 끝까지 노조를 지켜 6월 18일 신고필증을 교부받았다. 노조는 회사 측과 6월 26일 이후 8월 2일까지 제6차에 걸친 단체교섭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회사 측에서 소극적으로 나오자 조합원들이 독산동 공장장실에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그 결과 10월 12일 제7차 단체교섭으로 단체협약이 체결되어 비로소 노조 활동이 정상화되었다.
교육 활동은 노조 결성 초기에 기업주의 탄압과 악선전 속에서 노동자 의식 형성에 주요하게 영향을 미쳤다. 특히 교육 활동 중 ‘숙박교육’ 방식은 조합원간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가리봉전자 노조는 아프리(AAFLI) 지원으로 조합원 숙박 교육을 실시했다. 이 교육은 조합에 대한 의식이 없던 사람들도 조합원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열기와 강의 속에서 ‘조합 활동은 바로 나 자신의 일’임을 깨닫고 모두가 동지애로 뭉쳐질 수 있다는 점에서 뜻 깊은 교육이었다고 평가되었다.
가리봉전자 노조는 임금 인상과 작업 환경 개선은 물론, 월차, 의료보험 등 일상적인 부분에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에 가리봉전자 노조의 조사통계부는 1984년 11월 말경 설문 조사를 실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근무자들에 대한 중식 제공, 일요일 강제 특근 철폐, 수습사원의 월차휴가 실시, 작업자를 무시하는 관리자들의 태도개선 등 많은 문제를 해결하였다.
2. 1985년 임금 투쟁
1985년 들어 노동조합은 임금 인상 투쟁[이하 ‘임투’]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임투 준비에서 중요한 변화는 지역 내 노조들이 공동 임투를 논의하여 동시 교섭, 동시 투쟁을 계획한 점이다. 효성물산, 남성전자, 롬코리아, 가리봉전자, 삼경복장 등의 노조는 의견을 모아 5월 7일 동시 교섭에 들어가기로 했다.
임투는 준비부터 실질적 투쟁이었다. 임금 인상 준비 과정은 체계적인 조직 활동 틀을 마련하고 조합원들의 교육을 통하여 임투의 목적과 노조 활동을 활성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이 과정을 통해 섬유 업종 노동자들은 임금 인상을 월 10만원 미만의 저임금을 일소하는 데 초점을 맞춘 데 비해, 가리봉전자는 사무직과 생산직 노동자의 임금 격차 해소에 초점을 두고 생산직 노동자의 임금 26.8% 인상안을 결정하였다.
하지만 5월 8일 ‘임금 17.5% 인상, 휴가비 1만 원 인상’으로 타결되었다. 그 달 11일 동일제강 노동조합 탄압에 항의하여 한국노총 간부들이 구로구청에서 농성할 때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조합원들이 지원 농성, 20일에는 한국노총이 주최한 근로여성대회에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선일섬유, 가리봉전자, 남성전자, 롬코리아, 청계피복 조합원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또한 6월 1일 가리봉오거리에서 ‘구로지역 노조민주화추진연합’의 횃불 시위에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의 조합원 다수 참여하였다.
3. 구로동맹파업
1985년 6월 22일 정부는 4월 임금인상시의 파업농성을 주도한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의 김준용 위원장, 강명숙 사무장, 추재숙 여성부장을 노동쟁의조정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언론기본법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하였다. 가리봉전자노조 간부들은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선일섬유 노조 간부들과 대책회의를 열고 6월 23일 동맹파업을 결의하였다.
6월 24일 대우어패럴 노조가 파업을 시작하자 가리봉전자 노동조합 역시 구로공장과 독산공장에서 500여 명이 농성에 돌입하였다. 효성물산과 선일섬유 역시 같은 날 연대 파업에 들어가고, 그 다음날부터 구로공단 내의 다른 회사들도 지지 농성에 돌입하면서,역사적인 구로동맹파업이 시작되었다.
[결과]
그러나 6월 26일 효성물산의 농성이 강제해산되고, 27일에는 가리봉전자와 선일섬유의 동맹파업이 강제 해산되었다. 29일 대우어패럴 노조의 농성장에 구사대가 투입되면서 구로동맹파업은 구속 43명, 불구속 38명, 구류47명, 해고 및 강제사직 700여명이라는 상처를 남기고 종결되었다.
[의의와 평가]
가리봉전자의 노동쟁의는 1984년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위한 노조설립부터 시작한다. 기업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노조를 결성한 가리봉전자는 기업과의 임금 및 노동조건 개선에서 성과를 이뤄냈고, 나아가서는 구로동 내 다른 기업 노조들과도 연대하여 임금투쟁을 벌여나갔다. 가리봉전자 노동조합은 1985년 6월 대우어패럴 노조, 효성물산 노조 등과 역사적인 구로연대파업에 동참하였다. 이를 통해 정부와 기업의 노조 탄압을 저지하고 그 부당성을 폭로해 민주노조운동의 자주성을 지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동맹파업을 통해 1980년대 초 정부의 탄압에 개별노조로 대응해 와해됐던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