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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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曉星物産勞動爭議 |
영어음역 | Hyoseongmulsan Nodongjaengui |
영어의미역 | Hyosungmulsan Labor Difficulti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69-22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혜온 |
성격 | 노동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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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85년 6월 24일 |
종결연도/일시 | 1985년 6월 26일 |
발생(시작)장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69-22 |
[정의]
1985년 6월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에 있는 효성물산에서 구로동맹파업의 일환으로 일어난 노동 운동.
[역사적 배경]
노동운동에 대해 탄압으로 일관하던 5공화국 정권은 1983년 말부터 정권이 안정권에 들자 노동운동에 대해 유화책을 폈다. 이에 노조 결성이 활발해지고, 노동운동단체도 늘어났다. 그러나 한편 1984년의 경제상황은 7.8%의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외채이자 상환 과 더불어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수출 부진과 수입자유화 압력을 받고있었다. 이에 기업가들은 손실을 근로자들에게 전가하고자 했고, 자주적인 노조활동을 억압하려 하였다.
[발단]
효성물산[공장장 김무현]은 우리나라 10대 재벌그룹에 속하는 효성그룹 계열의 19개 회사 중 하나이다. 생산 품목은 주로 신사복, 파카, 바바리 등이며 유럽, 일본, 동남아 일대에 전량 수출한다. 종업원 수는 약 500명이다. 효성물산은 저임금과 차별 대우, 열악한 작업 환경 등에 놓여 있었고, 특히 욕설과 손찌검 등 가혹 행위와 비인격적 대우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식사와 세면장 시설 등도 매우 열악하여 노동자들의 실상은 너무나 비참하였다.
부당한 대우 개선을 목적으로 7차례에 걸친 노동조합을 결성 노력 끝에 1984년 드디어 59명의 인원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 중 20명이 탈퇴 내지 사표를 쓸 정도로 회사측의 탄압은 심했다. 그러나 노조에서는 소모임과 부서활동을 통해 조합원 확대에 노력하며, 1985년 임금 인상 및 식대 인하 협상을 회사측과 성공적으로 벌이며 민주 노조로 성장해 나갔다.
[경과]
효성물산 노동조합은 1985년 6월 22일 대우어패럴 노조 위원장 이하 3명이 노동 쟁의 조정법을 위반한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노조 지도부는 이것이 전반적인 민주 노조에 대한 탄압으로 갈 수 있다는 우려를 하였다. 이에 확대 간부 회의를 열고 대책을 논의하여 전면 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다.
6월 24일 14시경 400여 명의 조합원이 2층 현장에 모여 파업에 들어갈 것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구속자를 석방하라”, “ 노동 삼권 보장하라”, “노동 악법 철폐하라”, “노동조합 탄압 말라” 등의 구호와 노래를 부르며 농성에 돌입했다. 다음날인 6월 25일에는 맞은편 대우어패럴 조합원들과 함께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농성하였고,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의 다른 노조도 동맹 파업에 들어갔다. 총 10개 사업장에서 약 2500여명이 연대투쟁에 참여하였다.
저녁이 되자 회사에서는 노동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다른 노조들의 농성은 모두 끝이 났다며 해산을 권고하였고, 집행부에서는 다시 회의를 열어 노조원들을 귀가시키고 대의원과 상집 간부만 남아 동태를 살피기로 결정하였다. 다음날 새벽 1시쯤 대우어패럴 측에서 농성 현장을 강제 해산시키려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에 놀란 임원들이 징을 울려 다시 노조원을 불러 모아 파업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회사 측의 태도가 돌변하여 전기를 끊고 옥상 문을 밖에서 차단시키고 현장 입구마다 관리자들이 막아서서 한 번 나가면 못 들어오게 하였다.
6월 26일 아침 8시경 출근자들이 출근하기 위해 정문 앞에 나타나자 관리자들은 휴업 공고를 붙이며 못 들어오게 하였다. 농성장에 있던 간부 몇 명이 나가서 항의하자 관리자들이 번쩍 들어서 문밖으로 쫓아버렸다. 이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농성 조합원들은 회사의 태도에 분개하였다. 이날부터는 식사도 물도 차단되었다. 10시경에는 본사 무역부의 사원 80여 명이 회사로 들어와 ‘우리는 대우가 아니다, 효성인이다’라는 띠를 가슴과 머리에 두르고 정문 앞에서 결의를 하고 구호를 외치며 노동자들의 해산을 강요하였다.
저녁이 가까워오자 회사 측의 위협과 회유는 더욱 강해졌고, 지친 조합원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하였다. 회사 측과의 교섭을 원하는 여론이 있어서 교섭을 시도하였고, 농성장으로 올라온 공장장은 농성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해산을 강요하였다. 다시 회의를 한 결과 해산 쪽으로 의견이 기울어져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결과]
6월 24일 농성을 시작으로 구로 동맹 파업에 동참한 효성물산 노동자들은 회사 측과의 교섭을 통해 26일 농성을 풀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대우어패럴 농성장에서는 6월 29일까지 농성이 계속되다가 강제해산되었다. 효성물산 노조의 농성이 해산된 뒤 다시 농성을 벌이던 효성물산 조합원 36명은 6월 30일 신민당사에서 성명서를 발표하고 5일간의 농성을 풀었다.
[의의와 평가]
효성물산 노동 쟁의는 정부의 민주 노조 탄압을 저지하고 그 부당성을 폭로함으로써 민주 노조 운동의 자주성과 계급성을 지킨 비타협적 투쟁이었다. 또한 동맹파업이라는 사업장 간의 연대 투쟁을 통하여 노동자 간의 동질성을 확보하고 계급의식을 드높일 수 있었다 하겠다. 이는 노동자들이 개별 사업장이 아니라 노동자 일반으로 인식의 수준을 넓혀, 1980년대 초 정부의 탄압에 개별 노조로 대응하면서 와해됐던 민주 노조 운동의 한계를 극복한 것이었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