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001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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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宇-勞動爭議 |
영어음역 | Daeueopaereol Nodongjaengui |
영어의미역 | Daewoo Apparel Labor Difficultie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서울특별시 구로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구창환 |
성격 | 노동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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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연도/일시 | 1985년 6월 7일 |
종결연도/일시 | 1985년 6월 29일 |
발생(시작)장소 | 서울특별시 구로구 |
관련인물/단체 |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
[정의]
1984부터 1985년까지 서울특별시 구로구에 있던 대우어패럴에서 일어난 노동 쟁의.
[개설]
대우어패럴 은 수출입업 및 피복류 제조·판매업체로, 1964년 11월 원림산업으로 설립되어 1983년 12월 상호를 변경하였다. 1985년 7월 세계물산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가 2004년 3월 SK그룹에 편입, 다시 상호를 에스지위카스로 변경하였다.
[역사적 배경]
5공화국 정부는 정권이 안정기에 접어 든 1983년 말부터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한다. 이는 노동 운동에도 눈부신 부활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수년간 취업을 원천 봉쇄당하고 있던 민주노조 출신 해고 노동자들은 1984년 1월 블랙리스트철폐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진정, 해고 무효 확인 소송, 유인물 배포, 대중 집회 등의 방식으로 블랙리스트 철폐 투쟁을 펼쳐나갔다.
또 3월에는 ‘기업별 노조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노동 운동의 전국적·통일적 구심을 형성한다’ 는 목표를 내걸고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이하 ‘노복’]가 창립되었다. 전 원풍모방 노조 위원장 방용석을 비롯해 1970년대 민주노조 간부들이 주축이 된 노복은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높이기 위한 각종 교육 사업과 노동법 개정 투쟁을 전개하였다.
노동 현장에서도 그동안 억눌렸던 요구가 폭발적인 형태로 터져 나왔다. 1984년 5월 대구 지역 택시 노동자들이 차량 시위를 벌였고, 이 투쟁은 삽시간에 경상북도 경산, 대전, 서울, 강원도 강릉 등지로 번져나갔고 6월에는 부산에서도 대규모 파업시위가 일어났다. 같은 해 5월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노조 복구 투쟁을 시작으로, 노동자와 학생들의 연대 투쟁, 과감한 투쟁 전술 등으로 노동 운동은 물론 민주화운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목적]
대우어패럴의 노동 쟁의는 임금 인상과 불공정한 노동 조건, 열악한 작업 환경 개선을 목적 일어났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대우어패럴은 1984년 6월 노조를 결성하였으며, 1985년 6월에는 군사정권 및 기업가의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에 대항하기 위해 구로지역의 노조들과 연대투쟁을 벌였다.
[발단]
♦ 대우어패럴의 노조 결성과 임금협상 투쟁
서울특별시 구로구 구로1공단에 있는 대우어패럴은 대우그룹 계열의 의류 봉제 수출 회사로 종업원이 2,000명에 이르는 봉제업계에선 규모가 큰 회사였다. 자본금 25억 원에 1984년 36억 원의 흑자를 냈음에도 생산직의 월 평균 기본급은 7만 2000원에 불과할 정도로 임금 및 근로 조건이 열악하였다. 비인격적 대우의 문제와 연관되어 ‘관리자 및 사무직과의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도 높았다. 즉 관리자와 사무직에게는 상여금 400%를 지급하고 생산직 노동자에게는 200%를 지급하는 것을 비롯해, 가족 수당에서의 차별[월급제만 2만 원 지급], 식사 차별, 임금 인상의 차별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기업주들은 ‘생돈을 들여가며 일자리를 만들어 먹고 살게 해주었으니 고맙게 생각하라’는 태도였다.
이런 가운데 구로공단을 비롯한 경인 지역 사업장에서는 노조를 결성하거나 어용 노조를 민주화하려는 활동들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84년 구로 지역에서 민주노조를 결성한 사업장은 대우어패럴, 효성물산,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등이며, 부흥사의 경우는 노조 민주화 움직임이 1984년 이후 나타난다.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노조 위원장인 김준용 등 산악회원을 중심으로 한 105명이 6월 9일 섬유노동조합연맹[이하 ‘섬유노련’] 회관에서 노조 결성식을 가졌다.
6월 16일 설립 신고서가 교부되자 조합원이 1,400명으로 늘었다. 그러나 노조 결성 이후 단체협약이 체결되기까지 회사 측의 노조에 대한 폭력적인 탄압은 지속되었다. 노조를 지키려는 조합원들의 투쟁도 준법 투쟁에서 출발하여 한국노총 및 민한당사 농성으로 발전되었다.
회사 측은 간부들을 “제주도 여행을 보내주겠다, 부산 본부로 승진 발령을 내주겠다”고 회유하거나 “노조를 불순분자들이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간다”는 등 유언비어로 협박했으며, 이어 7월 19일에는 간부 4명을 해고시켰다. 또 조합원들에게는 “대우그룹은 노조 때문에 대우어패럴에서 손을 뗐다”며 불안 심리를 조성하고 관리자들을 동원하여 강제로 노조 탈퇴서를 쓰게 했다. 회사 측의 가장 중심적인 탄압방식은 비조합원들을 노조 반대파로 조직하여 연일 노조 반대 시위와 조합원 및 노조 간부를 폭행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관리자들이 조합원을 납치·감금하기도 했다.
이러한 폭력적인 탄압에 대응하여 노조는 1984년 9월까지는 부당 노동 행위 구제 신청서의 제출과 한국노총·민한당에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사업장 내의 농성 등 준법적 투쟁 방식으로 노조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회사 측의 탄압으로 노조 탈퇴자가 속출하면서 조합원이 처음 1,400명에서 100여 명으로 줄어들자 간부들은 노조의 존립에 대한 위기 의식을 갖게 되었다. 이에 회사 측의 노조 탄압을 폭로하여 사회 여론화시키는 투쟁 방식으로서 한국노총 점거농성[10. 20]과 민한당사에서 ‘노동3권 보장, 김우중 회장 및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10. 31]을 했다. 이런 투쟁의 결과 노조는 김우중과 직접 협상하게 되었고, 이후 7회에 걸친 교섭 결과 12월에 단체협약을 체결하였다.
[경과]
♦구로동맹파업과 대우어패럴 노동조합
1. 대우어패럴 노조 간부들 구속
1985년 6월 22일, 느닷없이 경찰이 들이닥쳐 위원장 김준용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을 연행해갔다. 위원장과 사무장, 여성부장이 구속되었는데 두 달 전 임금 인상 투쟁 과정에서 벌인 2차례의 파업 농성이 쟁의조정법, 집시법, 폭력 행위 등에 관한 법률 위반에 해당되고 노조의 소식지 발행이 언론 기본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임금투쟁 이후 어느 때보다 노사 관계가 평화롭던 시기에 두 달 전의 일을 새삼스레 문제 삼아 간부들을 구속한 것으로 보아 공안 정책상의 결정임이 명백하였다. 공안 당국은 구로공단의 구심으로 떠오르고 있던 대우어패럴 노조의 뒷덜미를 친다고 했겠지만, 그러나 정작 기습을 당한 것은 그들이었다.
2. 동맹파업의 결정과 투쟁
6월 22일 노조 집행부가 연행되었다는소식을 들은 대우어패럴 노조 조합원들은 작업을 중단하고 100여명이 회사 총무과로 몰려가 고발취소를 요구하며 항의하였다. 의장단과 집행부는 대책을 세우며 철야회의에 들어갔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공단 내 민주노조 간부들이 합동교육을 받기로 했던 날이었다. 대우어패럴 노조 대의원들이 비상대책회의를 여는 동안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청계피복 노조의 간부 200여 명은 교육 장소에 모여 밤새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노동 운동과 1980년대 노동 운동을 구분 짓는, 노동 운동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월요일인 24일 오후 2시를 기해 동맹 파업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대우어패럴 노조원들은 6월 24일 아침 8시 관리자들의 방해를 뚫고 350여 명의 조합원들이 1공장 2층 작업실에 모여 노조 조합원 일동 명의로 ‘우리의 결의’를 낭독하고 무기한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효성물산,가리봉전자, 선일섬유, 부흥사, 남성전기, 세진전자, 롬코리아, 삼성제약 노조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24일부터 27일 사이 파업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을 지지하는 민주통일민중운동단체연합,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 22개단체도 26일 오후 2시부터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6월 27일 파업 4일째되는 날 물과 음식이 차단된 채 대우어패럴 농성노동자들은 탈진 실신해100여명만이 남았다.
[결과]
파업 5일째인 6월 29일 회사는 폭력배 200여명과 사복경찰을 동원해 농성장의 벽을 뚫고 들어와 벽돌과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무차별 폭행을 자행해 노조원들을 강제해산시켰다. 다른 민주노조의 파업농성도 일단락되었다. 민주통일민중운동단체연합 등의 지지 농성자들도 성명서를 발표하고 해산하였다. 대우어패럴을 비롯하여 농성에 참여한 회사에서 구속 43명, 불구속 38명, 구류 47명 및 700여명에 이르는 해고와 강제사직자가 생겨났다.
[의의와 평가]
대우어패럴 노동조합의 파업은 구로동맹파업으로 전개되었다. 민주노조 간의 연대 투쟁은 1970년대 민주 노조 운동의 고립 분산적이고 조합주의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또한 동맹 파업은 노동 운동의 대중적 결합과 정치적 지향을 구체화할 수 있는 중요한 디딤돌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노동 운동의 조직 및 투쟁 방향을 새로이 모색하기 위한 논쟁의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