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3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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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匡治奈 |
영어공식명칭 | Gwangchina |
이칭/별칭 | 시중(侍中)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제도/관직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태봉,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홍승우 |
[정의]
강원도 철원 지역에 도읍한 마진과 태봉의 최고 관부인 광평성 소속의 수상직.
[개설]
광치나(匡治奈)는 904년 마진(摩震)을 건국한 궁예(弓裔)가 중앙정부 기구를 정비하면서 마련한 직제이다. 서사(徐事)·외서(外書)와 함께 마진 및 태봉(泰封)의 최고 관부인 광평성(廣評省)에 소속되어 백관을 통솔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삼국사기(三國史記)』 궁예전(弓裔傳)에서는 궁예가 904년 마진을 건국한 이후 처음으로 최고 관부 광평성을 설치하고 소속 관원으로 광치나·서사·외서를 두었다고 전한다. 광치나는 같은 기사에 고려의 시중(侍中)이라고 부기되어 있다. 이에 학계에서는 광치나가 고려의 수상직인 문하시중이었다는 데 착안하여 광평성의 지위를 고려의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비정한다. 그리고 904년 마진의 제도가 신라의 제도를 많이 따랐다고 전하는 『삼국사기』 신라본기(新羅本紀)의 기록에 의거하여 광평성과 광치나의 연원이 각각 통일신라의 집사성(執事省)과 시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이해한다.
신라의 집사성과 고려의 중서문하성이 진골귀족 혹은 문벌귀족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구였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광평성과 광치나 또한 궁예 정권을 지탱하던 호족의 의견을 수렴·대변하는 기구라고 볼 수 있다. 호족연합정권의 성격이 강하였던 건국 초의 상황이 반영된 결과 광평성과 광치나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 기구가 탄생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변천]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한 이후 단행한 인사 기록을 살펴보면, 광치나를 비롯한 광평성의 직제에 큰 변화가 보인다. 광평시중(廣評侍中)·광평시랑(廣評侍郞)·광평낭중(廣評郞中)·광평사(廣評史) 등의 관직명이 확인되고 있어, 광치나·서사·외서가 고려 건국 이전 어느 시점에 시중·시랑·낭중 등으로 개편되었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 시점은 마진에서 태봉으로 국호가 변경되고 체제가 재정비되었던 911년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논의되고 있다.
광평성의 개편 시점을 태봉 건국 전후로 보는 입장에서는 광치나에서 시중으로의 변화가 단순히 관직명의 변화에만 그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궁예가 ‘신정적 전제주의’를 펼치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광평성의 지위를 격하시켰고, 이에 따라 광치나의 위상 또한 약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913년 시중에 임명된 왕건이 궁예의 의심으로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였다는 사실, 왕건을 중심으로 세력이 결집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듬해 궁예가 왕건을 시중에서 해임하였다는 사실 등이 그 방증으로 제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