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3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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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泰封 |
영어공식명칭 | Taebong |
이칭/별칭 | 후고구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홍승우 |
특이사항 시기/일시 | 911년 - 마진(摩震)에서 태봉(泰封)으로 국호 개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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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사항 시기/일시 | 918년 - 태봉(泰封) 멸망 |
소재지 | 풍천원(楓川原) -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 |
[정의]
강원도 철원군에 도읍을 두고 마진으로부터 이어진 남북국 시대 국가.
[개설]
911년 마진(摩震)의 국왕 궁예(弓裔)는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바꾸고 수덕만세(水德萬歲)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엄밀히 말해서 태봉은 911년부터 918년까지 존속한 국가를 지칭하지만, 개념을 확장하여 궁예가 개창한 국가들을 태봉으로 통칭하기도 한다. 협의의 태봉은 궁예 정권의 특성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국가로 평가된다.
[궁예의 생애와 건국]
궁예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출생 직후 신라 왕실 내부의 권력 다툼에 휩쓸려 목숨을 위협받고 한쪽 눈까지 잃었다고 전한다. 10대 시절 출생 비화를 알고 강원도 영월의 세달사(世達寺)로 출가하였다가 신라 말의 혼란을 이용하고자 죽주(竹州)의 기훤(箕萱)과 북원(北原)의 양길(梁吉, 良吉)에게 차례대로 귀부하였고, 894년경 양길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의 무리를 거느렸다. 강원도와 그 주변을 공략하여 세력을 키운 궁예는 896년 태봉국 철원성을 도읍으로 삼아 나라를 세웠다. 896년 송악군(松嶽郡)의 유력 호족이었던 왕건(王建) 부자를 휘하에 들였다.
송악군을 기반으로 패서도(浿西道)와 한산주(漢山州)까지 장악한 궁예는 898년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901년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로 정하였다. 이 시기 궁예가 공공연하게 고구려 계승의식을 표명하였기 때문에 궁예의 고려를 ‘후고구려’로 명명하기도 한다.
궁예는 903년부터 재차 천도를 계획하였다. 패서 호족들을 견제하면서 궁예 자신의 지지기반을 결집시키기 위함으로 추정된다. 904년 철원을 새로운 도읍지로 선정한 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광평성(廣評省) 이하 중앙 관부와 광치나(匡治奈) 이하 주요 관직을 설치하였으며, 905년 철원 천도를 실행에 옮겼다. 마진 건국을 전후로 광평성 체제의 출범과 천도를 성사시킴으로써 궁예 정권의 정치적 위상은 확연히 달라졌다. 궁예는 신라의 제도를 본뜨는 수준에서 벗어나 중국식 관제를 도입·응용하여 중앙 통치 기구를 개편할 만큼 정치적 진전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태봉의 등장과 궁예 정권의 변모]
궁예는 911년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변경하였다. 궁예의 정치적 지향이 급변한 시점이었다. 일반적으로 태봉 건국을 전후하여 궁예는 신정적(神政的) 전제주의에 천착한 것으로 이야기된다.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신정적 전제주의의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중앙 통치 기구의 개편이 이루어졌다. 904년 성립된 광평성 체제는 호족 연합 정권을 뒷받침하였는데, 태봉 시기에 이르러 궁예의 전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광평성 체제의 개편이 이루어졌다고 추정된다. 광평성 체제 초기 서열 2위의 관부는 병부(兵部)였고 국왕의 측근 기관이었던 내봉성(內奉省)은 서열 9위에 불과하였지만, 태봉 말기 내봉성은 서열 2위로 승격되고 병부는 서열 4위로 강등되었다. 동시에 병부의 기능을 분리시킨 순군부(徇軍部)가 새롭게 등장하여 서열 3위를 차지하였다. 광평성에 소속되어 호족의 이해를 대변하고 백관을 통솔하였던 시중의 위상 또한 내봉성과 반대로 격하되었다.
두 번째로 미륵신앙을 활용한 공포정치가 나타났다. 태봉 시기 궁예는 미륵불을 자처하고 두 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과 신광보살(神光菩薩)로 불렀다. 궁예 자신이 직접 20여 권의 불경을 짓고 불법을 강설하였으며, 승려 석총(釋聰)의 사례에서 보이듯 불교 교단의 반발은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다. 미륵신앙은 교단뿐 아니라 신료들을 장악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 미륵관심법을 자득하였다고 공언한 궁예는 모반죄를 씌워 유력한 신료들을 숙청하였다.
[태봉의 멸망]
궁예의 공포정치는 점차 도를 넘어 무고한 일반 백성이나 아전들까지 희생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 궁예의 가족 또한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915년 궁예는 간언을 하던 부인 강씨(康氏)에게 음란죄를 씌워 강씨와 강씨 소생의 자식들마저 잔인하게 처형하였다. 결국 왕권 강화를 위한 방편이었던 신정적 전제주의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됨으로써 궁예를 신료·교단·일반민 모두로부터 고립시켰다. 민심을 잃은 궁예는 918년 6월[음력] 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홍유(洪儒)·배현경(裴玄慶)의 호위 속에 궁궐로 당도한 왕건에 의하여 축출되었다. 왕위에 오른 왕건이 국호를 고려로 변경함으로써 태봉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비록 승자인 고려 측의 기록이지만, 왕건이 궁궐에 당도할 때 항거하는 세력이 없었고 궁예도 왕건이 마음을 먹었다면 다른 방도가 없다고 말하였던 것으로 보아 태봉 말기의 궁예는 이미 지지기반을 상당히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