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3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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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南北國時代 |
영어공식명칭 | Period of Southern and Northern Kingdom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김창석 |
[정의]
통일신라와 발해가 양립하던 7세기 후반부터 10세기 전반까지 시기 강원도 철원 지역의 역사.
[개설]
강원도 철원 지역은 통일신라 시기 한주 소속의 철성군이었고 통일신라 말 궁예가 세운 태봉의 첫 도읍지였다.
[7세기의 철원]
신라는 7세기 전반까지 철원 지역을 장악하여 군으로 삼고 한산주[한주]에 소속시켰다. 진평왕 때부터 치열해지던 삼국 간의 전쟁은 진덕여왕 대에 신라-당나라 사이에 군사동맹이 맺어지면서 통일 전쟁으로 발전하고 당나라, 나아가서 일본이 참전하는 국제전으로 확대되었다.
7세기 중엽 신라의 서북변 경계는 칠중하, 즉 한탄강, 임진강 상류 선이었다. 신라군은 칠중성을 지나 칠중하를 넘어서 고구려 군사와 마주치고 장새[황해도 수안]를 거쳐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따라서 철원 지역에서도 신라와 고구려 사이에 공방전이 펼쳐졌을 것이다. 668년 고구려는 멸망하였지만 당나라가 신라까지 점령하려는 의도를 비치자 신라는 곧 당과 일전을 겨루었다. 나당전쟁의 주 전장이 지금의 황해도 동남부와 경기 북부 지역이었다. 672년(문무왕 12) 신라 군사와 고구려 유민이 연합하여 당군과 싸웠으나 패배한 석문성이 지금의 황해도 서흥에 있었고 675년(문무왕 15) 큰 전투를 벌여 신라가 승리한 매소성은 연천군의 대전리산성으로 비정된다. 철원 지역에서도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당군과 신라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주 철성군]
지명 변경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고구려 때의 철원군을 그대로 계승하여 썼다고 보인다.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전국적인 지명 개정을 벌이면서 철원군을 철성군(鐡城郡)으로 바꿨다. 언덕, 구릉을 뜻하는 ‘원’을 ‘성’으로 고쳤을 뿐 ‘철’은 유지하였으므로 지역적 상징으로서 철은 남북국시대에도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그리고 경덕왕 때 한산주를 한주로 개명하였다. 철성군의 관하에는 두 개의 현이 있었다. 동량현은 현재 북한 지역인 인목면으로 고구려 때 승량이라 불렸다. 공성현은 지금의 연천군 연천읍으로 고구려 때 공목달현이라고 불렸다.
[태봉의 도읍지]
혜공왕 대 이후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면서 신라는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중앙에서 진골 귀족들이 정변을 일으킨 것과 동시에 전국에서 지방 세력들이 성장하여 농민과 손을 잡고 각지에 할거하였다. 신라의 왕자로 알려진 궁예는 왕위 쟁탈전에서 패배한 측에 속하여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지역에 있던 세달사의 중이 되었다가 반란에 가담하였다. 먼저 죽주[지금의 경기도 안성]에 근거지를 둔 기훤에게 투신하였다가 대우를 받지 못하자 북원경[지금의 강원도 원주]의 양길에게 갔다. 양길의 군사를 이끌고 강원도 지역을 석권한 궁예는 894년(진성여왕 8) 철원에 입성하여 여러 관부를 설치하였다. 898년(효공왕 2) 송악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901년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을 칭하였다. 905년에 도읍을 다시 철원으로 옮기고 911년에는 국호를 태봉으로 고쳤다. 태봉의 관제는 고려 초까지 계승되었으며 태봉국 철원성이라고 불리는 철원읍 홍원리의 풍천원에는 절터, 석등 등이 남아 있다. 918년 신하였던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919년(태조 2) 송악으로 다시 천도함으로써 철원 지역은 고려의 교주도에 속한 지방 도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