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3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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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三國 時代 |
영어공식명칭 | Period of Three Kingdom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창석 |
[정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세 나라가 정립하던 시대 강원도 철원 지역의 역사와 문화.
[개설]
삼국 시대의 철원 지역은 백제, 고구려를 거쳐 적어도 7세기 전반 무렵 신라에 의해 장악되었다.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곳]
철원은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 태백산맥의 서쪽, 즉 강원 영서 지역의 북부에 있다. 장흥리에서 구석기가 발견된 바 있어 철원 지역에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정주하지 못하고 기후의 변화와 사냥감의 이동에 따라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그 생활 모습을 자세히 알 수 없다. 군탄리 유적을 비롯한 신석기 시대 유적을 통해 비로소 사람들이 철원 지역에 정착하여 간석기를 이용하여 농경과 목축을 하고 빗살무늬토기에 곡물을 저장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치체의 등장과 임둔]
청동기 시대가 되면 토성리, 문례리 등지에 분포하는 고인돌과 같이 정치적 지배자의 대형 무덤이 만들어졌고 벼농사도 시작되었다. 철원을 포함하여 영서 북부 지역 곳곳에 정치제, 즉 지배-피지배 관계가 성립된 지역 집단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을 포괄한 상위 정치체가 임둔이었다. 함경남도 남부 지역의 지역 정치체까지 임둔에 속하였다. 기원전 2세기 초에 고조선이 임둔을 복속시켰다.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임둔군을 설치하였으니 철원 지역도 그 지배를 받게 되었다. 임둔군이 폐지된 후 낙랑군의 통제가 이어졌다.
[영서예 사람들의 생활]
당시 철원에는 예족에 속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함경도 남부와 영동 지역의 동예가 유명하지만 동예는 영동예의 준말이고, 철령을 중심으로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의 이서에 살던 예족 집단을 영서예(嶺西濊)라고 부른다. 바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말갈 또는 낙랑이라고 기록된 집단이다. 이 집단은 중도식 토기라고 부르는 경질무문토기를 사용하고 출입구를 따로 설치한 평면 凸자 혹은 呂자형 주거지에서 살았다. 정치적 지배자가 죽으면 고인돌이나 돌무지무덤에 묻었다. 『삼국지』 예전을 보면, 예인들은 10월에 무천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으며 호랑이를 신으로 받들었다. 다른 집단을 침범하면 배상하는 책화라는 습속이 있었고, 길이가 긴 창을 이용하고 보병전에 능숙하였다고 하는데, 동예뿐 아니라 철원에 살던 영서예 집단도 이렇게 생활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백제, 고구려, 신라의 진출]
낙랑군이 쇠퇴하여 313년 망하게 되자 철원 지역에 백제가 잠식하여 들어왔다. 5세기 말 광개토대왕 때가 되면 고구려가 백제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시작한다. 413년에 건립된 광개토대왕릉비를 보면, 396년(영락 6)에 백제의 58성 700촌을 빼앗았다고 하니 철원 지역도 이때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신라는 6세기 중엽 진흥왕 때 남한강 줄기를 따라 강원 영서 지역과 충청북도, 그리고 경기도, 서울 지역으로 북서진하였다. 춘천 지역까지 장악한 것은 확인이 되지만 철원 지역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때 신주를 설치하였고 637년(선덕여왕 6) 신주로부터 영서 지역을 분리하여 우수주를 두었으므로 이때는 철원이 신라의 판도로 분명히 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