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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033
한자 儒敎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포천시
집필자 박경자

[정의]

경기도 포천시에서 활동해오고 있는 공자 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 또는 종교.

[유교의 전파와 향교 설립]

유교는 일찍부터 동아시아의 한자 문화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한국에는 위만 조선과 한사군(漢四郡) 설치 전후, 즉 기원전 2~3세기경에 한자의 유입과 더불어 유교 경전이 들어왔다고 한다. 당시 유교는 중국 한대(漢代)에 국교로 성립된 경학(經學) 중심의 유교였을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삼국 및 통일 신라 이후 유교를 통해 관료·교육 제도와 국가 의례 등이 정비되었다.

경기도 포천지역에 유교가 전파된 것은 고려 시대부터라 할 수 있다. 당시 주된 신앙 대상은 불교였지만 현실적인 국가 운영에서는 유교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방 제도의 정비와 함께 각 군현에 향교를 세워 강학(講學)과 함께 문묘(文廟)[공자를 제사하는 사당]의 제향(祭享)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중앙 정부의 제도와 의례에 국한되던 유교가 지방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경기도 포천 지역에는 1173년(명종 3)에 처음으로 향교가 설립되어 지방민의 교화와 유교 교육이 진행되었다.

고려 말 원(元)으로부터 성리학이 수입되면서 유교는 전연 새로운 모습을 띠었다. 형식적 교양에 치우쳤던 유교에 철학적인 내용이 담기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조선 개국과 더불어 유교가 불교를 배척하고 사회 개혁의 실천적 경향을 띠면서 한국 사회에 정착되어 갔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포천에서도 유교가 점차 세력을 넓혀나갔다. 당시 포천에 정착한 저명한 유학자로는 성여완(成汝完)·성석린(成石璘) 부자를 들 수 있다.

성여완은 고려가 멸망한 후에 포천군 신북면 왕방산 아래에 은거하면서 절개를 지킨 충신이다. 하지만 성여완의 아들 성석린은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유교의 이념과 문화를 사회에 확산시키고 국가 제도를 정비하고 성리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 외에 조선 초기의 충신 유응부(兪應孚)도 대표적인 유학자였 다.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에서 출생한 유응부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고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참혹한 죽임을 당한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유교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다.

[붕당 정치와 서원 설립]

경기도 포천은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특색으로 인해 왕손과 대신들의 사패지(賜牌地)가 많아 그 후손이 세거하면서 유교 문화를 주도한 지역이다. 16세기 이후 사림 세력이 등장하여 붕당(朋黨)을 형성하면서 유교적 명분론과 도학(道學)의 정통성이 강조되었다. 이에 포천에서도 사족 중심의 향촌 사회 지배 구조가 형성되면서 지역 유림의 강학 장소이자 교육 기관인 서원이 설립되어 유교 사회의 기초가 저변에까지 확대되어 갔다.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는 1635년(인조 13) 이곳 출신의 이항복(李恒福)을 기리는 화산 서원(花山書院)이 가장 먼저 건립되었다. 1730년(숙종 46)에 화산(花山)으로 사액되었다. 이후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興宣)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위패는 매안(埋安)되었다. 그 뒤 1971년에 지방 유림들의 공의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이항복의 위패가 봉안된 인덕각(仁德閣)과 내신문(內神門), 동서 협문(東西夾門), 필운재(弼雲齋)와 동강재(東岡齋) 등 강당을 겸한 재실이 있고 서원 내의 여러 행사는 재실에서 치러졌다. 지금도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고 매년 9월 중정(中丁)에 향사(享祀)가 진행되고 있다.

1658년(효종 9)에는 지방 유림의 공의로 박순(朴淳)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옥병 서원(玉屛書院)이 창건되었다. 1698년에 김수항(金壽恒)을 추가로 배향했으며 1713년(숙종 39)에 ‘옥병(玉屛)’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 서원이 되었다. 그 뒤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렸다. 지방 유림은 위패를 서원 터에 매안(埋安)하고 단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1978년에 옥병 서원 복원 추진회를 결성하여 1980년 6칸의 숭현각(崇賢閣), 신문(神門), 동서 협문, 담장, 동·서재, 홍살문 등을 건립하였다. 사우인 숭현각에는 박순을 주벽(主壁)으로 이의건, 김수항, 김성대, 윤봉양, 이화보 등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박순의 신도비가 있다. 서원에서는 매년 3월 1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691년(숙종 17)에는 이사상(李師相) 등 남인계 유생이 이곳에 은거하며 만년을 보낸 이덕형(李德馨)조경(趙絅)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용연 서원(龍淵書院)을 지었다. 임진왜란 당시에 이덕형의 공로가 인정되어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 시에도 존속되었다. 당시 경내에 사우(祠宇)·강당·동재(東齋)·서재(西齋) 등이 있었으나 6·25 전쟁 등으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사우만 남아 있다. 사우에는 이덕형조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용연 서원은 1976년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었으며, 지방 유림은 이 서원에서 매년 봄·가을에 향사가 있다. 옥병 서원을 중심으로 서인 세력이 우세하였고, 허엽이 살았던 중부 지역에서는 용연 서원을 중심으로 동인의 세력이 우세하였다.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이자 대표적 성리학자인 김창협(金昌協)·김창흡(金昌翕) 형제도 포천에 살았다. 이들은 성리학 학설에 이(理)와 기(氣)의 작용을 모두 인정하는 절충적인 입장을 취하여 주리·주기 양파의 성리학설을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조선 말기 이후 포천 유교의 현황]

19세기에 사회가 대내외적으로 동요하면서 유교도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하는 사회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으나 세도 정치로 권력이 일부 집단에 독점되어 유학자의 정치적 진출이 좌절되었고, 외세의 압박과 외래 종교인 천주교의 확산으로 유교의 전통적 지위가 위협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도학의 의리 정신에 입각하여 주자학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다. 역사적 위기에 유교의 근본이념을 재인식하고 도학 정신을 재천명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유교 질서를 재정립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항로(李恒老)를 중심으로 한 화서 학파(華西學派)가 이를 주도해 나갔다. 이들은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화이론(華夷論)의 의리 정신에 입각하여 서양 세력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강상(綱常)의 윤리를 밝혀 서양의 침략에 맞섰다. 외세의 압력에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고, 특히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도학의 의리 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려 하였다.

이항로의 수제자로서 화서학파의 중심인물이었던 김평묵(金平默)은 가산면 시우촌 출신이었다. 또한 일본과의 화친에 반대하여 수차례 지부 상소(持斧上訴)를 올리고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최익현(崔益鉉)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출신이다. 이와 같이 포천 출신 유학자는 유교를 수호하려는 의리 정신과 외세에 대한 저항 의식을 통해 침략 세력에 대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려 하였다. 서양의 물질문명에 대하여 도덕적 질서를 존중하는 유교적 전통 문화의 우월성이라는 신념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사당(祠堂)과 단(壇)]

경기도 포천에 남아 있는 사당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는 최치원(崔致遠)을 봉사하는 고운 영당(孤雲影堂) 사우가 있었는데 1935년 경 청성사(淸城祠)로 개칭되었다. 사우 중앙에는 가로 89㎝, 세로 135㎝의 최치원의 73세 때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데 작자와 연대는 알 수 없다. 청성사는 단층 목조 와가(木造瓦家) 맞배지붕으로 언제 건립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사당 주위는 자연석 막돌로 축조된 담장을 둘렀고 대문은 솟을삼문으로 꾸며져 있다. 1975년 9월 5일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에는 최익현을 봉사하는 채산사(茝山祠)가 있다. 1906년 유림의 발의로 건립되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일본군이 훼철하였다. 1935년에 재건하였다. 그러나 1943년 또다시 훼철되어 해방 후인 1947년에 복원했으나 퇴락하여 1975년 해체 복원하였다. 채산사 중앙에 최익현 위패와 그 옆 배면 벽에 길이 2m, 폭 1m의 영정(影幀)이 보존되어 있다. 좌측에는 최익현의 아들이자 독립운동가인 최면식(崔勉植)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사당은 1976년 8월에 경기도 기념물 제30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음력 9월 15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에는 조선 왕조의 개국공신이며 청해 이씨(靑海李氏)의 시조인 이지란(李之蘭)이지란의 8세손 이중로(李重老)를 모시는 청해사(靑海祠)가 있다. 청해사는 1970년 포천 문화원과 포천 유림이 중심이 되어 건립되었다. 1986년 4월 포천시 향토 유적 제25호로 지정되었고 매년 음력 3월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연곡리에는 김성대(金聲大), 김성발(金聲發), 김성옥(金聲玉), 김평묵 등 4명을 배향하는 동음사(洞陰祠)가 있다. 1831년 영평 유생의 발의로 연곡사를 창건했으나 1907년 일제가 일부를 불태웠고 1952년 6·25 전쟁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1961년 포천 유림과 안산 김씨 문중이 중심이 되어 사당 건립 위원회를 구성하여 1962년 본전을 준공하고, 1988년 삼문과 담장을 준공하였다. 1986년 4월 포천시 향토 유적 제34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길명리 산175-1번지에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양사언(楊士彦)을 기리는 길명사(吉明祠)가 있다. 1988년 양사언 출신 가문인 청주 양씨(淸州楊氏) 후손들과 포천 문화원장, 포천 향교 전교 등 지역 유림의 주관으로 착공하여 본전을 준공하였다. 1991년 6월 솟을삼문과 담장 공사를 완공하고 사당을 조성하여 그해 11월에 양사언의 위패와 영정을 안치하고 배향하였다. 2006년 4월 포천시 향토 유적 제45호로 지정되었으며 매년 음력 9월 16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포천에는 충목단(忠穆壇), 요산단(堯山壇), 산앙단(山仰壇), 운담 영당(雲潭影堂) 등이 남아 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에 있는 충목단(忠穆壇)에는 유응부를 모셨다. 1746년(영조 22)에 단(壇)을 세우고 유허비를 세웠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훼손되었다. 그 뒤 1890년에 훼철된 터에 충목공의 단비를 세우고 이어(李淤)양치(楊治)의 단비를 옆에 세우고 향사하였다. 중앙에 석비를 세우면서 표면에 ‘조선국 충신 유총관 응부 유허비(朝鮮國忠臣兪摠管應孚遺墟碑)’를, 뒷면에 ‘숭정후 재병인 4월일(崇禎後再丙寅四月日)을 각각 새겼다. 경기도 기념물 제102호이며 매년 음력 9월에 추향(秋享)이 진행된다.

요사단은 조선 후기의 학자 김창흡의 향사를 모시는 사당이다. 1850년(철종 1) 요산 영당(堯山影堂)이란 사액을 받았으나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이에 요산 영당 터에 단을 세우고 향사를 모셨는데 1967년 6·25 전쟁 때 훼손된 터와 석재를 수습하여 개수하였다. 1987년에는 현지인 신읍리 삼연의 묘소 아래에 새로 설단(設壇)하였다. 음력 4월 춘향사(春享祀)를 거행하며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는 포천의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향사를 거행하고 있다.

산앙단은 1893년 최익현, 유기일(柳基一) 등 포천의 유림이 성금을 모아 김권(金權)을 기리고자 설치한 단이다. 1898년 포천 유림의 합의로 김평묵을 배향했고, 1995년 유기일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처음에 주벽인 김권의 호를 따서 졸탄단(拙灘壇)이라고 했는데 산앙단으로 개칭되었다. 향사는 매년 음력 9월에 지내고 있다.

경기도 포천시 일동면 화대리 625-1번지에 있는 운담 영당에는 김평묵, 송시열(宋時烈), 이항로, 안향(安珦), 주자(朱子) 등 5명을 배향하고 있다. 6·25 전쟁으로 전부 소실되었는데 포천 지역 유림이1993년 8월부터 복원을 추진하여 1999년 10월 완공하였다. 복원 후 기존의 배향 인물 4명 이외에 한국 성리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안향[1243~1306]을 추가 배향하였다. 2006년 4월 포천시 향토 유적 제46호로 지정되었다. 매년 음력 3월에 제향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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