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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998
한자 成石璘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성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338년연표보기 - 성석린 출생
몰년 시기/일시 1423년연표보기 - 성석린 사망
출생지 성석린 출생지 - 경기도 포천시
묘소|단소 성석린 묘쇼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 2리 산30
신도비 성석린 신도비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 2리 산30
성격 학자|문신
성별
본관 창녕(昌寧)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고려 말 조선 전기 포천 출신의 학자이자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 아버지는 부원군 성여완(成汝完)이다.

[활동 사항]

성석린(成石璘)[1338~1423]은 1357년(공민왕 6) 과거에 급제하여 국자 학유(國子學諭)에 제수되었다.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제현(李齊賢)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항상 글을 짓게 하였다. 예문관의 공봉(供奉), 삼사(三司)의 도사, 전의시의 주부 등을 지냈다. 공민왕도 그를 중용하여 차자방(箚子房)[뒤의 상서원(尙瑞院)]의 필도치(必闍赤)로 등용하였다. 전교시 부령, 지인 상서(知印尙書), 예부 총랑 등을 역임하였다. 신돈(辛旽)의 미움을 사서 외관으로 밀려 해주 목사가 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사성·삼사 좌윤·밀직사 좌부대언·지신사·제학 등을 지냈다.

1380년(우왕 6) 여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원수(元帥)가 되어 부장 양백연(楊伯淵)과 나아가 싸웠다. 여러 장수가 왜적의 기세에 눌려 후퇴하려 하자,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을 주장하여 적을 무찔렀다. 그 해 가을 양백연의 옥사에 연루되어 함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부름을 받아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지고 정당문학에 올랐다. 외직으로 양광도 관찰사가 되어 주·군에 의창(義倉)의 설치를 건의하여 조정에서 모든 도에서 행하도록 하였다. 이후 문하부 평리와 대사헌이 되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조선 건국에 참여하여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의 녹권이 내려지고, 창성군 충의군(昌成郡忠義君)에 봉해졌다. 조선 태조가 즉위하자 문하시랑 찬성사가 되었고, 1392년(태조 1) 개성부 판사를 거쳐 한성부 판사를 지냈으며, 원종공신이 되어 노비 세 명과 토지 30결을 하사 받았다. 1395년(태조 4)에는 고려의 명당 가운데 한 곳으로 알려진 부소(扶蘇)를 도읍으로 정하라고 건의하였다. 정종이 즉위하여 외직으로 서북면 도순찰사와 서북면 도절제사, 평양 부윤을 지내고 내직으로 문하시랑 찬성사를 지냈다. 익대공신(翊戴功臣)의 녹권이 내려지고, 문하 우정승에 올랐다가 좌정승이 되었다.

태종이 즉위해서는 좌명공신이 되고, 창녕 부원군에 봉해졌다. 1403년(태종 3)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통감강목(通鑑綱目)』과 『십팔사략(十八史略)』을 가지고 돌아왔다. 우의정에 이어 1407년(태종 7) 좌의정을 지냈으며, 이어 영의정 부사로 국방 대책 등의 ‘시무 20조’를 진달한 상서를 올렸다. 이 해 원단(圜壇)에서 왕을 대신하여 기우제를 올리기도 하였다.

1408년(태종 8) 하륜과 함께 세자의 사부가 되었고, 1411년(태종 11) 사직을 원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1414년(태종 14) 부원군으로 휴직하였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조가 함흥으로 행차하여 돌아오지 않았다. 태종이 태조의 환궁을 위해 중신 가운데 문안사를 차출하여 보냈으나 태조는 꿈쩍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영의정으로 태조와 친분이 두터웠던 성석린을 문안사로 지명하여 보내니 태조가 크게 반가워했다고 한다. 이에 태조의 옛 친구로서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하여 태조와 태종이 화합하게 되었다. 1415년(태종 15) 영의정이 되었으나 다시 부원군으로 물러났다. 1421년(세종 3) 노신으로서 왕에게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검소한 생활을 즐겼다고 전한다.

[학문과 저술]

초서를 잘 쓰고 시를 잘 지었다. 저서로 『독곡집(獨谷集)』이 있다. 말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쉬는 곳에 항상 한 나무 궤를 놓아두고 앉아 ‘양화(養和)’라고 이름 하였다. 왕명으로 ‘태조 건원릉 비문(太祖健元陵碑文)’을 썼고,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 편찬에 참여하였다.

[묘소]

묘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고일 2리 산30번지에 있다.

[상훈과 추모]

1423년(세종 5) 86세로 별세하자 왕이 제문을 내리고 부의(賻儀)하였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1790년(정조 14) 2월 지방관에게 명하여 묘소에 제사할 것을 청하는 건의가 있었고, 1799년(정조 23) 9월에는 태종 때 좌명공신에 책록된 서른여덟 명의 맏손자 명단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충훈부의 요청에 따라 유학(幼學) 성유완(成有完)의 명단이 올라가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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