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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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黃在成-妻江陵劉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효자·열녀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만오 |
출생 시기/일시 | 1855년 - 황재성의 처 강릉유씨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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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시기/일시 | 1932년 - 황재성의 처 강릉유씨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32년 - 장안리 강릉유씨 효열각 건립 |
출생지 | 전라북도 무주군 |
사당|배향지 | 장안리 강릉유씨 효열각 -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대소리 |
성격 | 효부 |
성별 | 여 |
본관 | 강릉(江陵) |
[정의]
근대 무주 출신의 효부.
[활동 사항]
황재성(黃在成)의 처 강릉유씨[1855~1932]는 1855년(철종 6)에 전라북도 무주군에서 태어났다. 17세 때에 황재성과 혼례를 올렸으며, 당시 시댁에는 90세를 넘긴 시부모가 있어, 시부모를 언제나 친부모처럼 지극정성을 다하여 섬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황재성의 처 강릉유씨야말로 진정한 효부(孝婦)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부모를 위하는 황재성의 처 강릉유씨의 마음은 남편이 병으로 몸져누운 후에도 전혀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간절해졌다. 남편 황재성은 8년이나 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때 집안의 살림살이는 모두 바닥이 나고 말았다. 그래서 남편의 병간호나 어린아이들의 양육, 그리고 시부모 봉양은 모두 황재성의 처 강릉유씨의 몫이었다.
강릉유씨는 숱한 고생을 하면서도 시부모를 위해서는 언제나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장만하였다. 그 뒤 남편이 죽으면서 늙은 시부모를 잘 모셔 달라는 유언을 남기자, 강릉유씨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보다도 더 간절한 마음으로 시부모를 봉양하였다. 언제나 시부모의 마음을 편하고 또 기쁘게 해 주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러면서도 어린아이들도 훌륭하게 키워 냈다. 1932년 강릉유씨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였다.
[상훈과 추모]
무주 유림들이 앞장서 강릉유씨의 행실은 반드시 후세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포창을 추천하게 되었고, 공부자성적도속수 오륜행실 중간소(孔夫子聖蹟圖續修五倫行實重刊所)에서 허락을 받아 효열비(孝烈碑)를 건립하게 되었다. 1932년에 장안리 강릉유씨 효열각(長安里江陵劉氏孝烈閣)이 건립되었으며, 2017년 현재 전라북도 무주군 부남면 대소리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