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5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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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文書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Document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철배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의 문화재로 지정된 고문서와 무주 지역 관련 고문서의 현황.
[개설]
고문서(古文書)는 특정한 주체가 어떠한 용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한 대상에게 전달한 글과 도장, 수결(手決)이 담긴 것을 총칭하는 것으로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되지만 국왕 문서(國王文書), 관부(官府)의 공문서(公文書), 왕실 등의 준공 문서(準公文書)와 개인·사찰·서원·결사 등이 발행한 사인 문서(私人文書)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고문서들은 예로부터 사료로서의 일차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으므로 사서(史書), 실록(實錄), 관서 일기(官署日記) 및 문집(文集) 등의 자료에 폭넓게 인용되어 전해지고 있다.
무주군 내 고문서는 무주군 관내 지정된 일반 동산 문화재로서 고문서 및 전적과 기타 1945년 이전에 사용한 문서로서 특정한 주체가 어떠한 용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특정의 대상에게 전달한 글과 도장, 수결이 담긴 것을 총칭하여 말한다.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03호로 지정된 향산사 소장 불서(香山寺所藏佛書)[19권 17책의 불서와 다라니판] 및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31호로 지정된 연안 이씨 이유길 가전 고문서(延安李氏 李有吉 家傳古文書)를 비롯하여 각종 고문서가 존재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무주군 내 문중이 소장한 고문서는 연안 이씨, 김녕 김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흥양 이씨 등 몇몇 가문으로 한정할 수 있는데, 이들 세거 가문의 연원을 밝히고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
[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지정 무주군 고문서]
향산사 소장 불서는 조선 전기부터 작성된 것으로 확인되는 43종 97책, 즉 목판본 30종 75책, 필사본 11종 12책, 신식본 2종 10책 등이다. 이 중 1474년 궁실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인수 대비(仁粹大妃)의 명에 따라 간행한 『상교정본 자비 도장 참법(詳校正本慈悲道場懺法)』과 『운수단(雲水壇)』 2종, 보문사 판 「천지명양수륙재의찬요(天地冥陽水陸齋儀纂要)」 등 다수의 불교 전적은 조선 시대 궁중의 불교 의례를 전담했을 가능성이 있는 인근의 영각사(靈覺寺) 또는 안국사(安國寺)에 봉안되었던 불상의 불복(佛腹)에서 발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안 이씨 이유길 가전 고문서는 조선 중기의 충신 연안 이씨 이유길(李有吉)과 그 후손에 관련된 고문서로 총 3종 25점[교지, 예조 입안, 완문]이다. 이유길은 아버지 이선경(李善慶)이 왜적과 싸우다 전사하자, 원수를 갚기 위해 당시 21세의 나이로 종군, 임진왜란[1592] 때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명량 해전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619년(광해군 11)에는 좌영장(左營將) 김응하(金應河)와 함께 군사 3,400여 명을 거느리고 출전, 진자두에서 진을 치고 적군 6만 명과 대치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다. 그해 3월 심하(沈河)에서 군량 보급이 끊겨 굶어가면서 명나라에서 원군(援軍)과 함께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조선 순조 때 이유길에게 높은 벼슬과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영구히 사당에서 제사 지내도록 하는 특전도 베풀었다. 연안 이씨 이유길 가전 고문서는 바로 이유길과 그 자손에게 나라에서 내린 각종 포상 조치 등과 관련된 것들로, 이유길과 그 아들 이우인(李友仁) 및 손자 이징국(李徵國)에 대해 나라에서 내린 교지(敎旨)이다. 이유길의 후손인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의 이호룡(李浩龍)은 연안 이씨 이유길 가전 고문서 3종 25점 외에 교지·교첩(敎牒) 14점, 소지(所志)·상서(上書)·완문(完文) 등 7건, 시호 교지(諡號敎旨) 3점 등 51점 이상을 소장하고 있다.
[무주 지역 개인 소장 고문서]
2004년 무주 문화원에서 간행한 『무주 지역 개인 소장 고문서』에 따르면, 무주군 무주읍 읍내리 김해 김씨, 무풍면 현내리 흥양 이씨, 증산리 김녕 김씨, 안성면 장기리 김해 김씨, 부남면 대유리 김해 김씨, 대유리 밀양 박씨, 장안리 김해 김씨 등 다수가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읍내리 김해 김씨 문중 고문서(邑內里金海金氏門中古文書)는 1711~1882년에 발급된 교지 2점, 전령(傳令) 33점, 첩(帖) 10점, 입안(立案) 2점, 완문 1점, 준호구(準戶口) 21점 등 6종 39건이다. 1711년에 작성된 예조 입안 문서(禮曹立案文書)는 어떤 사안에 대하여 법전에 의거하여 절차에 따라 관청에서 작성하여 교부해 주던 증명서와 같은 것이다. 토지, 가옥, 노비 등을 매매하거나 후사가 없어 양자를 입양할 때 관청에서 발급하기도 하였다. 완문은 수령을 보좌하던 자문 기관인 향청(鄕廳), 유향소(留鄕所)에서 증명, 허가, 인가, 명령 등 처분에 관하여 당해 관청에 이를 증빙하기 위해 관문서 형식으로 발급한 문서로, 내용은 부동산(不動産), 조세(租稅), 부역(賦役), 군역(軍役), 면리(面里)의 공적 경비에 관한 것 등이었다. 교지는 국가에서 개인에게 발급한 임명장이며, 첩은 중앙 관아에서 하급 관원의 임명이나, 지방 관아에서 제관, 품관, 또는 향리를 임명할 때 사용하는 고문서이다. 전령은 관원이 자기 관하의 하급 관리나 백성들에게 내리는 명령문(命令文)이나 훈유문(訓諭文)이다. 준호구는 개인의 요청에 의해서 관청에서 발급한 주민 등록 같은 것이고, 호구 단자는 3년에 한번씩 개인이 관청에 제출했던 호적 관련 서류이다.
현내리 흥양 이씨 문중 고문서(縣內里興陽李氏門中古文書)는 1855~1907년 3대에 걸친 호구 단자(戶口單子) 및 신호적(新戶籍) 4매, 무과 급제 교지(武科及第敎旨) 등 2점, 동학 관련 등장(等狀), 상서, 첩지(帖紙) 등 3점이다. 호구 단자는 환부 이재근(李在根)이 행부사(行府使)에게 1855년에 작성하여 제출한 것으로 두 아들 내외와 비(婢) 7명, 노(奴) 3명을 신고한 것이다. 이후 이현교(李賢敎)가 1884년[47세], 1893년[56세]에 추가로 호구 단자를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2점의 교지 중 하나는 1887년 이현교가 무과의 병과 시험에 급제한 사령장이고, 다른 하나는 이현교를 선략 장군(宣略將軍) 행용양위 부사과(行龍驤衛副司果)로 임명하는 교지이다. 또한 1894년 전(前) 사과(司果) 이현교를 무주 지역 도통령(都統領)으로 임명하는 첩지가 있다. 등장은 1895년 무풍 유생 이시목(李時睦) 등이 거창 소모사(居昌召募使)에게 제출한 것으로, 동학 때 무주 지역 도통장(都統將)으로 특차되어 활동한 이현교의 포창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등장은 조선 시대 진정서의 일종으로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여러 사람이 이름을 잇대어 써서 관청에 어떠한 요구를 하소연하던 상소와 같은 것이다. 갑오 동학 농민 운동 때 도통장으로 활약한 이현교의 포창을 요구하는 상소를 1897년 무주 유생 김구영(金九永) 등이 영남 관찰사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증산리 김녕 김씨 문중 고문서(曾山里金寧金氏門中古文書)는 1897년에 석항리에 사는 김해영(金海榮)이 무주 군수에게 올린 상서로 효행이 남달랐던 김철동(金哲東)을 표창해 달라고 요구한 상서이다. 같은 해에 무주 향교 교임 박중호 등은 32명이 연명하여 무주 군수에게 김철동의 효행을 포창해 달라고 등장 형식으로 올렸으며, 석항리의 존위와 풍남면 집강은 무주 군수에게 첩보의 형식으로 같은 내용을 올렸다. 이어서 1903년에 무주 유생 권대형과 이시발 등이 내부대신에게 청원하는 등장을, 1906년에는 도내 유생 황경주(黃京周) 등이 순찰사에게 표창해 달라는 연명 상소를 올렸다. 다만 이러한 진정에도 불구하고 참의(參議) 김철동의 효행이 표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장기리 김해 김씨 문중 고문서(場基里金海金氏門中古文書)는 교지 6점으로, 1680년 부사과(副司果) 김이항(金爾恒)의 무과 급제 교지를 시작으로, 1722년 한량(閑良) 김정혁(金廷爀)의 무과 급제 교지, 1829년 김의규(金懿圭)에게 발급한 교지, 1829년 김의규의 무과 급제 교지 등이 있고, 칙령(勅令)은 1902년 고종의 명에 따라 80세 이후 기로소(耆老所)에 든 사서인(士庶人)에게 가자(加資)한다는 원칙 아래 김영식(金永植)을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임명한 내용이다. 1905년에 발급된 임명장은 궁내부(宮內府)에서 종사랑(從仕郞) 김현태(金顯泰)를 분충의(分忠義)에 임명하는 교지이다.
대유리 김해 김씨 문중 고문서(大柳里金海金氏門中古文書)는 1774~1884년에 3대 90년간 발급된 호구 단자 12점과 준호구 7점, 명문(明文) 3점, 소지와 입안, 수기(手記) 등 각 1점을 비롯하여, 1853~1910년에 57년간 발행된 산송(山訟) 관련 문서 7점, 교지와 칙령 2점이다. 호구 단자가 3년마다 관에 제출할 목적으로 호적을 정리한 것이라면, 준호구는 오늘날의 주민등록과 같은 것으로 개인의 요청에 따라 호적 사항을 발급한 증서이다. 명문은 개인이 사회 경제 생활을 위해 주고 받았던 매매 문서이며, 소지는 선산에 투장이나 투총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관에 제출한 산송 관련 문서이다. 교지는 1886년 김봉윤(金鳳允)을 통정대부에 임명한다는 내용이며, 칙령은 1903년 고종의 명에 따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사서인(士庶人)이 80세에 이르면 가자(加資)를 내리는 원칙 아래 정3품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린 사령장이다.
대유리 밀양 박씨 고문서(大柳里密陽朴氏古文書)는 호구 단자 12매이다. 어영청(御營廳)의 군보(軍保)였던 박악지(朴岳只)와 아들 박한룡(朴汗龍), 손자 박동철(朴東喆) 등 3대에 걸친 호구 단자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호구 단자는 1828년에 작성한 것으로 무주군 부남면 대치리 어영보(御營保) 박악지의 43세 때 호적을 시작으로 47세, 73세, 76세 때 호구 단자이고, 박악지의 아들 박한룡의 39세, 41세, 45세, 48세 때 호구 단자, 박악지의 손자 박동철의 18세, 21세, 28세, 33세 때 호구 단자이다.
장안리 김해 김씨 문중 고문서(長安里金海金氏門中古文書)는 무주군 부남면 장안리에 거주하는 김현영(金顯榮)이 1885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같은 해 김현구(金顯九)가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 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과 행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에 임명됨에 따라 내려진 교지를 포함한다. 또한 김현구의 품계를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처함에 따라 김현구의 부인을 유인(孺人)에 임명하는 교지가 내려졌으며, 김현구의 부모 및 조부모 내외에게도 추증 교지가 발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