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647
한자 東學農民運動
영어공식명칭 Peasant Uprising of 1894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장동표

[정의]

1894년 10월 밀양의 농민군들이 참여한 농민운동.

[개설]

동학은 19세기 후반 최제우가 창립한 반봉건과 반침략의 성격을 띠고 있는 민중 종교이다. 지배층의 수탈로 민중들의 저항이 전국적으로 계속 발생하던 시기에 경상남도 밀양에서는 1862년(철종 13) 환곡 운영의 폐단에 저항하는 농민들이 봉기하였고, 1890년 전후 밀양의 동학농민군이 조직되었다. 1890년대 들어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자, 1893년 2월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금구 및 경상도 밀양에서도 동학교도들 ‘수만’ 명이 운집하여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밀양에서의 동학농민운동]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은 3월의 제1차 농민항쟁, 5월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 폐정개혁 활동, 9월 이후 제2차 농민항쟁으로 전개되었다. 호남을 중심으로 전개된 반봉건·반침략 성격의 제2차 항쟁 단계의 농민군은 1차와 달리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 정부군, 민보군 등의 연합 세력과 맞서야 했기 때문에 열세였다. 2차 항쟁 때 경상도 지역 농민군이 10월 성주, 상주, 선산 등지를 점거하자, 일본군이 즉각 개입하였고, 부산·동래·물금·삼랑진·밀양·청도·대구 등지에 병참부를 설치하고 군용 전선을 깔았다. 농민군은 군용 전선의 단절 등 일본군의 후방에서 공격하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밀양의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 10월 12일[양력] 일본군에 대항한 농민군의 반외세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죽창과 백기를 든 1,500~1,600명의 동학농민군이 밀양부 관아에 진입하였고, 이에 위협을 느낀 밀양부사와 전운사가 삼랑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헌병대에 원조 요청을 하였다. 농민군은 신무기로 무장하고 바로 출동한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이 전투로 농민군 8명이 죽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후 밀양 영남루를 강제로 점거하여 주둔지로 삼고, 부근의 객사를 무고한 백성들을 잡아 고문하는 옥사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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