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396
한자 歷史
영어공식명칭 History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선사/석기,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장동표

[정의]

선사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밀양시의 역사.

[선사]

밀양에는 지금부터 대략 2만 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본다. 밀양의 구석기 사회의 존재는 가지산 계곡의 단장면 고례리(古禮里) 유적지[밀양 고례리 사화동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와 격지 등의 유물을 통하여 알 수 있다. 밀양의 인접 지역에서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도 사람이 살았을 것이다.

[삼국시대]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삼한의 변진 12개국 가운데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 지금의 밀양 지역에 있었다. 미리미동국을 밀양으로 보는 근거는 첫째, ‘미리(彌離)’는 ‘밀’의 표기이고, 둘째, ‘미동(彌凍)’은 ‘물동’이라는 의미에서 삼한시대 축조된 수산제(水山堤)가 있었다는 점 등이다. 3세기 후반에 이르러 신라 세력권으로 편입된 미리미동국낙동강 유역의 농업 선진 지대로서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의 국력 신장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역사 유적지로서 4세기 후반 조성된 부북면 월산리 고분군과 6세기 초반부터 100년 정도 철을 생산하였던 단장면 사촌마을의 제련로(製鍊爐) 유적 등이 관련되어 있다. 신라 505년(지증왕 6) 당시 밀양은 추화군(推火郡)이었으며, 지금의 추화산성 이름은 추화군에서 비롯되었다. 757년(경덕왕 16) 전국을 9주로 나누고 명칭을 고칠 때 밀성군(密城郡)이라 하였다.

[고려시대]

고려 시기 밀양은 995년(성종 14) 전국을 4도호부 10도로 나누고 경상도가 영동도, 영남도, 산동도로 나누어질 때 영동도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 밀주(密州)로 고쳐 격을 높이고 군수를 자사로 개칭하였고, 인근 창녕군과 청도군을 속군으로, 현풍현, 계성현, 영산현, 풍각현은 속현으로 두었다. 전결수와 공부(貢賦)[국가에서 각 군현의 산물에 부과한 현물]는 『고려사』에 나오는 병종별 군액(軍額)이 인근 고을보다는 훨씬 많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상당하였을 것이다. 무신정변 때의 방랑시인 임춘은 밀양을 ‘산군이 수려하고 인재는 걸출하며, 전야는 비옥하고 풍속은 순후한 예의의 고장’이라 하였다.

무신 집권 시기인 1200년(신종 3) 밀양 관노 50여 명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1271년(원종 12) 밀양 사람 방보(方甫) 등은 삼별초군의 대몽항쟁에 가담하여 싸웠다. 몽고군에 굴복한 고려 정부는 밀양인의 ‘반역’ 가담을 이유로 밀양을 1276년(충렬왕 2) 반역군으로 규정하여 일반 주군의 서열에서 귀화부곡(歸化部曲)의 지위로 격하시켰다가 1285년(충렬왕 11) 다시 밀성군(密城郡)으로 승격시켰다. 고려 말기 성리학을 이념으로 한 밀양의 일부 사족들은 권문세족에 대응하는 신진사대부 계층으로 등장하였다. 정몽주, 길재, 이색 등과 함께 고려 8은 중의 한 사람인 송은(松隱) 박익(朴翊)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조선시대]

조선 초기 지방 제도가 팔도 체제로 전환되면서 밀양은 1415년(태종 15) 1,000호 이상의 고을을 모두 도호부로 만들 때 밀양도호부로 정식 확정된다. 속군이었던 청도와 창녕, 속현이었던 현풍과 영산이 독립되었다.

밀양도호부의 규모는 비교적 큰 것이었다. 1425년(세종 7) 밀양의 호구는 1,612호, 인구는 1만 1086명이었고, 농경지는 당시 울산과 김해 등 이웃 고을에 비하여 넓었다. 세곡은 삼랑진 조창에 집하되면, 낙동강 수로를 따라 상주까지 배로, 충주의 경원창까지는 육로로, 다시 한강 상류까지 수로를 따라 운송하였다. 농민들의 병역 부담은 서울의 왕성을 숙위하는 시위군(侍衛軍) 120명, 도내의 각 진에 부방하는 진군(鎭軍) 230명, 각 포의 만호(萬戶)에 가서 복무하는 선군(船軍) 542명 등이 배정되어 교대로 번상하였다. 밀양의 향교는 조선 시기에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김종직과 같은 명유(名儒)들이 많이 배출되고 도호부가 설치된 큰 고을이었던 만큼 향교 교육이 활발하였다. 서원은 1567년(명종 22)에 설립되고 1670년(현종 11) 사액을 받았던 예림서원이 대표적인데, 김종직, 박한주, 신계성 등 3인의 유학자를 배향하였다.

임진왜란 때 밀양은 동래와 부산에 이어 두 번째로 난을 당한 격전지였다. 왜군이 물밀 듯이 쳐들어오자 밀양의 관군은 삼랑진 작원관에 제2 방어선을 구축하여 왜군과 싸웠으나 끝내 무너졌다. 그렇지만 김태허, 손기양 등의 밀양의 사족들이 왜군 침입을 저지하기 위한 의병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무안 출신 사명당 유정은 승병들을 의승군으로 조직하여 왜군과 전면에서 싸우는 등 업적을 크게 남겼다. 전란으로 무너진 향촌질서의 복구는 양반 사족들에 의한 1624년의 향안 중수, 1648년의 향약의 실시, 서원의 이건과 중수 등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향안 중수에 의병 활동으로 공을 세운 인사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향약 시행은 1648년(인조 26)의 「무자향약입의」와 1836년(헌종 2)의 「병신향약입의」 등으로 조선 후기까지 계속 이어졌다.

조선 후기 사회변동은 19세기 반봉건 농민항쟁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밀양에서는 1862년(철종 13) 6월 농민 수백 명이 읍내로 진입하여 항쟁을 일으켰다. 밀양부사는 감영의 서리 집에 숨어 버렸고, 향리들은 결박되었으며, 집이 파손되었다. 이러한 항쟁의 흐름은 1894년 9월 밀양의 동학농민군 1500~1600명이 관아를 공격하고 일본군과 싸웠던 제2차 동학농민운동으로 발전하였다. 동학농민군은 근대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패퇴당하고 말았지만, 일제하 반봉건·반외세 민족운동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조선 초기 축성된 밀양읍성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점차 사라져 갔다. 더구나 1902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는 시점에 읍성의 사대문과 성벽은 완전히 헐리게 되었고, 당시 남아 있던 남천강 변 성벽의 석재는 모두 경부선 철로 공사에 이용되면서 사라졌다. 밀양도호부는 1896년 경상남도 밀양군으로 개칭되었다.

[일제 강점기]

밀양군은 1914년 지방행정 구역 개편 때 13개 면으로 개편되었다. 1931년 4월 밀양면이 밀양읍으로 승격되었다. 1929년 9월 삼문동에 세워진 밀양군 청사 건립 기공식을 가졌다.

밀양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3일 밀양 장날 윤세주의 「독립선언서」 낭독을 시작으로 수천 군중들에 의한 만세 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당일 부산에서 급파된 일본 헌병대에 의하여 시위 군중은 일단 해산된다. 1919년 3월 14일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거리 시위에 군중들이 가세한 만세 운동, 3월 15일 시회를 이용한 밀양 유림의 시위, 3월 20일 밀양의 덕망 인사 안희원장례 행렬을 이용한 시위 등으로 연속되었다. 1919년 4월에 들어 각계각층의 항일운동으로 확대되었다. 4월 2일에는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 4월 4일 표충사 승려 50여 명과 주민 1,500여 명의 헌병 주재소 습격, 4월 6일에는 부북면 춘화리 농민 500~600여 명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과 4월에 집중적으로 전개된 밀양의 3·1운동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해산되었고, 검거된 주동 인물이 수십 명에 이르렀다.

밀양은 걸출한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였다. 3·1운동 후 조선총독부 파괴 등 철저한 비타협 항일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던 의열단 창립 주역 13인 중 단장 김원봉을 비롯하여 윤세주 등 밀양인이 5명이나 되었다. 1920년 의열단원 최수봉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1927년 10월 밀양에 신간회 지회가 결성되었고, 의열단 사건으로 복역하였던 황상규, 김병환 등이 밀양청년회와 신간회 밀양지회에서 활발한 항일운동을 벌였다.

[현대]

미군정기 지방행정은 일제하의 행정구역 틀을 그대로 답습하였던 만큼 특별한 변화는 없었다. 초대 군수로 이상룡이 1년간 재직하였다. 당시 군에는 총무과, 보건과, 재무과, 산업과 등 4개 과가 있었고, 면에는 서무계, 재무계, 산업계 등 3개의 계가 있었으며, 읍은 면과 같았지만 면에 없는 보건계가 있었다. 1963년 삼랑진면삼랑진읍으로 승격되었고, 1973년 7월 하남면하남읍으로 승격되었다. 1984년 시점 밀양군은 3개 읍, 9개 면, 1개 출장소로 구성되어 있었다. 1989년 1월 밀양읍이 밀양시로 승격되어 밀양시[6동 28통 316반]와 밀양군[2읍, 9면]으로 분리되었고, 1991년 4월 초대 밀양시와 밀양군 의회가 개원되었다. 1995년 1월 밀양시와 밀양군의 통합으로 밀양시[2읍, 9면, 6동]가 되고, 밀양시 의회가 개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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