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206
한자 丹場面
영어공식명칭 Danjang-myeon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기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연표보기 -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95년 1월 1일연표보기 -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에서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으로 개편
성격 법정면
면적 142.14㎢
가구수 2,531가구
인구[남/여] 4,272명[남 2,121명|여 2,151명]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 속하는 법정면.

[개설]

단장면(丹場面)은 경상남도 밀양시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으로 울산광역시 울주군과 양산시와 접하고 있다. 서쪽에는 산외면이 있다. 남쪽으로 삼랑진읍과 이웃하며, 북쪽으로 산내면과 접하고 있다. 면 소재지인 태룡리를 비롯한 12개 리를 관할한다.

[명칭 유래]

‘단장(丹場)’ 지명은 봉황이 깃들고 신선이 사는 곳이라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으로 개설되었다. 1995년 1월 1일 밀양군과 밀양시 통합에 따라 경상남도 밀양시 단장면이 되었다.

단장면임진왜란 이후인 17세기 초에 밀양부 중동면에 속하였다. 당시 중동면의 범위는 지금의 산내면, 산외면단장면 권역을 포섭하고 있었다. 18세기 말에 단장면 인구가 증가하면서 중동면에서 분리되었다. 이후 1860년경에 다시 중동면으로 포섭되어 중삼동면(中三同面)이 되었다가 1880년에 다시 단장면으로 분리·환원되었다. 1789년 『호구총수(戶口總數)』에 ‘단장면’ 지명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중동면에서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단장면 지명에서 비롯된 단장리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밀양 도기소가 소재하였던 곳으로 수록되어 있다.

17세기 초 단장면이 중동면에 편입될 당시 소속된 리는 고예리단장리, 사촌리, 영정사 등 4개 마을에 불과하였다. 『호구총수』에 고예리를 비롯하여 17개 리가,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1832]에는 고례리, 평리를 비롯하여 21개 리가 있어 당시 인구가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06년(광무 10) 관내의 21개 방리(坊里)를 통폐합하여 12개의 법정리를 구성하였다.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1912]에는 사연리, 무릉동을 비롯하여 13개 리가,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에는 덕성리(德城里)가 제외되어 12개 리가 소속되어 있다.

[자연환경]

단장면 동쪽의 재약산(載藥山)[1,119.1m]은 산지 일대가 험준하면서 풍광이 뛰어나 영남알프스 산군(山群)에 포함된다. 재약산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산줄기는 만어산[669.5m]에서 삼랑진읍과 경계를 이루고, 북쪽의 정각산[860.1m]으로 이어진 산줄기를 사이에 두고 산내면과 이웃한다. 『대동여지도』[1861]에는 재악산가지산(迦智山)[1,241m]에서 남쪽 영취산(靈鷲山)[1,082.2m]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에서 서쪽으로 분리된 지맥에 묘사되어 있다. 단장면의 동쪽 산록에는 계류천들이 흘러 시전천, 용포천 등의 지방 하천을 이룬다. 시전천, 용포천 등은 단장천을 거쳐 동천으로 유입한다. 단장천 상류에는 층층폭포, 흑룡폭포 등이 있으며 상류에는 밀양댐이 축조되어 있다.

[현황]

2021년 12월 현재 2,531세대, 4,272명[남자 2,121명, 여자 2,15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단장면의 면적은 142.14㎢로서, 밀양시를 구성하는 9개 면 중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나 그중 80% 이상이 산지이다.

취락은 산록의 계류천 유역에 형성되어 있다. 농경지는 단장천 하류 유역, 안법천이 동천으로 유입하는 일대와 감물리의 산간 분지에 주로 분포한다. 대부분 벼와 함께 대추, 한천, 표고버섯, 맥문동을 특산물로 재배한다.

면 소재지는 태룡리이다. 교육기관이 일찍부터 설립되어 태룡초등학교는 1924년, 범도리산동초등학교는 1935년에 설립되었다. 재약산에는 자연 휴양림이 조성되어 있으며 표충사(表忠寺)밀양 칠탄서원(密陽七灘書院)[경상남도 문화재자료]을 비롯한 역사 유적이 있다. 표충사는 원래 654년(무열왕 원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영정사(靈井寺)라고 하고 또 재약사(載藥寺)라고 하다가, 조선 후기 표충사(表忠祠)를 이곳으로 옮겨 표충서원(表忠書院) 으로 발전하면서 그 수호사찰 표충사(表忠寺)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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