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1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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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光州學生運動發祥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한백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9년 11월 3일 - 광주학생운동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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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30년 3월 - 광주학생운동 종결 |
발단 시기/일시 | 1929년 10월 30일 - 나주역에서 한일 학생 충돌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99년 4월 30일 - 광주학생운동발상지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26호 지정 |
발생|시작 장소 | 광주제일고등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독립로 237번길 33[누문동 144] |
발생|시작 장소 | 전남여자고등학교 - 광주광역시 동구 제봉로 158번길 8[장동 39-12] |
발생|시작 장소 |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 - 광주광역시 북구 능안로 30[오치동 5] |
[정의]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시작한 곳과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한 학생들이 다녔던 학교.
[개설]
1929년 광주학생운동[광주학생독립운동]은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공립농업학교, 도립전남사범학교에 다녔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해서 전개되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는 지금의 광주제일고등학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는 지금의 전남여자고등학교, 광주공립농업학교는 지금의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이다. 광주공립농업학교는 지금의 광주광역시 북구 임동에 있었으나, 1976년 북구 오치동 교사(校舍)로 이전하였고 현재는 택지지구로 변하였다. 도립전남사범학교는 없어졌고, 그 부지에 광주중앙도서관이 있다.
광주제일고등학교에는 1954년 건립된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전남여자고등학교에는 1959년 건립된 '광주학생독립운동 여학도 기념비', 광주자연과학고등학교에는 1976년 이전한[1959년 광주공립농업학교 교정에 건립]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이 있다. 광주학생운동발상지는 1999년 4월 30일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배경]
1926년 6.10만세운동 이후 학생들은 식민지 노예 교육 철폐, 조선 역사 교육, 수업 중 조선어 사용, 학생회의 자치, 언론과 집회의 자유 등을 주장하면서 동맹 휴학을 전개하였다. 동맹 휴학은 학생들의 비밀결사에서 주도하였는데, 전라남도 광주 지역에서는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 광주공립농업학교, 도립전남사범학교 학생들이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비밀결사는 학생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켰고, 일제에 항거하여 수차례의 동맹 휴학을 강행하면서 단결력을 키웠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규모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경과]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일본인이 발행하던 신문에서는 불공정 보도를 하였고, 일본 경찰이 편파적으로 수사하면서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이에 비밀결사에 참여한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학생들이 연대하여 대규모 거리 시위를 벌였다.
1929년 11월 3일 일본의 4대 국경일 중 하나인 메이지[明治] 천황의 탄생일을 기리는 명치절(明治節) 기념식에 참석하였던 한국인 학생들은 기념식이 끝나자 불공정 보도를 한 일본인이 발행하던 신문사를 습격하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어 학생들은 학생투쟁지도본부를 결성하고, 11월 12일 장날을 이용하여 '구속 학생 탈환', '경찰의 교내 침입 반대', '한국인 본위의 교육 제도 시행',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등을 주장하면서 운동을 전개해 갔다.
전라남도 광주에서의 학생운동 소식을 들은 서울의 조선청년총동맹(朝鮮靑年總同盟)은 전국의 청년 단체, 학생 단체와 연락하여 전국 각지에서 학생들이 항일운동을 펼치게 하였다. 1929년 12월에는 전국 주요 도시에서 학생운동이 진행되었으며, 1930년 1월 중순부터 도시 지역뿐만 아니라 읍·면 단위 지역 학교까지 확산되었다. 투쟁의 형태도 시험 거부, 백지 동맹, 동맹 휴학, 격문 살포, 교내 시위, 거리 시위 등으로 다양해졌다.
[결과]
광주학생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1930년 3월 말까지 진행되었다. 전국 194개 학교에서 5만 4000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였다. 일제의 강력한 탄압과 조치로 구속 1642명, 퇴학 582명, 무기정학은 2330명이 받았다.
[의의와 평가]
3.1운동 이후 일어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항일 학생운동이 시작된 곳이어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