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800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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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葛末邑三一運動 |
영어공식명칭 | Kalmareup 3.1Manseundong |
이칭/별칭 | 갈말읍 3·1만세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강원도 철원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영규 |
[정의]
1919년 3월 12일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에서 전개되었던 항일 만세 운동.
[개설]
1919년 3월 1일 서울로부터 「독립선언서」가 평강 천도교구장 이태윤에게 도착하였고, 철원 천도교 교훈 최병훈에게 200매, 김화 천도교인 채장숙에게 150매가 전달된 것이 강원도 철원 지역 3·1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철원군은 경원선 철도가 읍내 한복판을 지나기에 서울의 정보가 거의 실시간으로 전달되어 강원도에서 가장 빠르게 만세 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다.
[역사적 배경]
3·1운동 은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여 전개된 동학농민운동, 애국계몽운동, 의병활동 등 일련의 민족운동이 민족 내부에 축적되었다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국제정세 변동을 주체적으로 기민하게 포착하여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1919년 3월 11일 갈말면 문혜리[현 갈말읍 문혜리] 주민이었던 보성전문학교 학생 김칠룡이 철원읍에서 온 사람으로부터 만세 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고 받은 것을 계기로 갈말면[현 갈말읍] 내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경과]
김칠룡은 3월 12일 갈말읍 문혜리의 서당 훈도 신성규와 함께 당시 갈말면 내대리·상경리·문혜리·토성리 등에 연락을 취하며 만세 운동을 추진하였고, 면 소재지였던 문혜리의 김학길·전사진·김경삼·김순복·김상보를 참여시켰으며, 내대리의 임낙호와 동막리의 윤호병, 그리고 토성리의 황철성에게 연락을 취하였다. 각 마을에서 집집마다 한 사람씩 참가하도록 연락하였으며, 토성리·동막리·내대리·도창리 주민들은 청양리 헌병주재소가 있는 지경터로 모이게 하고 문혜리·군탄리 등 남부 지역의 주민들은 문혜리 면사무소가 있는 어음째로 집결시켰다.
이후 청양리 주재소 앞 즉, 지경터에서 토성리로 펼쳐진 벌판에 모인 군중은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만세를 불렀다. 지경터에서 시위를 벌이던 군중은 오후 1시경 문혜리로 향했고 문혜리 주민과 합세한 후 면사무소로 가서 만세를 불렀다. 면사무소 직원들은 모두 도망쳤고 저녁이 되어 황희수 면장이 나타나 군중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 시위 군중은 밤이 깊어도 돌아갈 줄 모르고 쌓였던 울분을 터뜨려 만세를 불렀으며 또 흥을 돋우기도 하였다. 늦은 밤 면장의 권유로 해산하였으나 동막리 주민은 귀가 길에서도 만세를 불렀기에 마을에 도착한 것은 이튿날 새벽이었다고 한다.
[결과]
갈말읍 3·1운동 참가 군중은 약 800명이었다. 갈말읍 3·1운동 전개 당시 내대리의 임낙호와 윤호병은 만세 운동을 주도하다가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의의와 평가]
갈말읍 3·1운동은 철원읍 3·1운동에 이어 일어났던 3·1운동으로 철원군 각 지역에서 지역 주민들에 의해 만세 운동이 주도되고 진행되었음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