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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1179
한자 獨立運動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이계형

[정의]

경기도 포천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경기도 포천지역의 독립운동가는 의병, 대동 청년단, 대한 광복회, 3·1 운동, 대한 독립단, 주비단, 의열단, 한국 독립당, 광복군 등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였다. 먼저 의병 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가 적지 않다. 경기도 포천 지역이 구한말 의병 운동의 중심지였던 것과 포천 출신의 김평묵(金平默)·최익현(崔益鉉) 등 화서 학파의 위정척사 사상의 영향이 컸다. 최익현은 을사늑약 이후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대마도에서 순국한 이후 전국의 의병 운동을 고무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경기도 포천지역에서 의병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1907년 7월 군대 해산 이후였다. 특히 이은찬(李殷瓚)·연기우(延基羽)·강기동(姜基東)·김연성(金演性) 등이 의병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는데, 여기에 경기도 포천 출신들이 가담한 경우가 많았다. 이은찬은 1907년 8월 관동 창의진을 결성한 이후 1908년 12월부터 1909년 2월까지 가장 활발하게 의병 전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헌병 분견소를 공격하는가 하면,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 기산리·유동리, 이동면 노곡리, 내동면 오림리·무림리와 경기도 양주군 등지에서 토벌군과 적극적인 교전을 벌였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 유격전을 펼쳐 대승을 거두기도 하였다. 이때 경기도 포천 출신의 윤태산(尹泰山)·이백원(李白元)·이사인(李思仁)·김순복(金順福)·김수동(金守同) 등이 이은찬의 의병 부대에서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연기우는 2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송우리 일대에서 일본 헌병을 습격하여 수 명을 사살했으며 일동면에서도 일본 헌병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와 더불어 군자금 모집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당시 포천 출신의 박복인(朴福仁)이 일본군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헌병 보조원 출신의 강기동(姜基東)은 의병을 일으켜 주로 경기도 양주·포천 지역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 강기동은 이은찬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해 6월 격문을 띄워 병사를 모우고 지속적인 대일 투쟁을 맹세하였다. 이어 1908년 10월 경기도 포천군을 근거지로 양주·가평 등지에서 1910년 2월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펼쳤다. 이때 포천 출신의 조삼룡(趙三龍)·윤응원(尹應元)·권승묵(權承黙)·김복길(金福吉) 등이 강기동 의병 부대에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들은 이은찬의 의병 부대와는 달리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게릴라전을 통한 보급 투쟁에 주력하였다.

김연성은 1907년 12월 의병 40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포천군 서면 왕방산에 출동하여 기습 작전을 벌였다. 김연성은 연기우·강기동 의병 부대와 함께 1909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에도 불구하고 1911년까지 20~30명의 소규모 부대를 편성하여 경기도 포천 지역의 산악 지대를 근거로 끈질긴 항전을 계속하였다. 당시 김연성의 의병 부대에서 활동하던 포천 출신의 유문재(柳文在)가 일본군에 피체 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외에 포천 출신의 서춘만(徐春萬)은 윤인순의 의병 부대에 들어가 경기도 고양 일대에서, 진성교(秦成敎)는 박기복(朴基福)의 의병 부대에 가담하여 경기도 연천 일대에서 의병 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음으로 3·1 운동 관련 독립운동가도 많다. 경기도 포천 지역의 3·1 운동은 3월 13일 오전 11시 포천 공립 보통학교 정수환(鄭壽煥) 등 3·4학년생들의 주도하에 일본인 교원의 눈을 피해 학교 뒷산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비롯되었다. 같은 시각 영중면(永中面)에 위치한 영평 공립 보통학교에서도 시위운동이 기도되었다.

이런 가운데 3·1 운동은 경기도 포천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첫 대중적 만세 시위는 3월 24일 영중면 영평리소흘면 송우리에서 일어났다. 경기도 포천군 영평에서는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독립 만세 운동을 전개하면서 군청 사무소를 습격하고 친일 면장을 응징했으며 영평 헌병 분견소를 공격하였다.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송우리에서는 주민 600여 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했으나 이를 막던 송우리 헌병 분견소 헌병 경찰들의 총검에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어 3월 29일에는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무봉리군내면 유교리에서도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30일에는 3·1 운동 기간 동안 경기도 포천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다.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일동면·이동면·영중면 주민 2,000여 명이 신북면사무소 앞에 모여 집회를 갖고 대대적인 연합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시위대는 일본 헌병 경찰과 충돌했고 헌병 경찰의 무차별적인 총격으로 이영여(李榮汝)·최석휴(崔錫休)·성성문·이치상(李致相)·서성달(徐成達) 등이 순국하고, 고진환(高鎭煥)·유중식(兪中植)·함병현(咸炳鉉)·이이만(李二萬)·조계식(趙啓植)·조훈식(趙薰植)·최학돌(崔學乭)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4월 1일에는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기산면 주민 200여 명이, 4월 3일에는 일동면 장암리 주민 500여 명과 노곡리 주민 400여 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했고 신북면 삼정리에서도 시위운동이 일어났으며, 4월 4일에는 영북면 자일리에서 안응건(安應乾)이 만세 시위운동을 기도하였다. 또한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다른 지역에서 3·1 운동에 가담했던 신영희(申榮熙)[양주군]가 순국했고, 이종원(李鍾遠)[서울]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배화 여학교 학생이었던 김마리아(金瑪利亞)·안희경(安喜敬)·안옥자(安玉子)가 피체되어 고초를 겪었다.

이외의 독립운동가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10년 전후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은 국내에서의 항일 투쟁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설치하거나 국내에서 각종 비밀 결사를 통한 지하 운동을 전개하였다. 비밀 결사 중 대표적인 것은 1915년 7월에 결성된 대한 광복회였다. 대한 광복회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마련, 친일파와 일본인 고관의 처단 등을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경기도 포천 출신의 최익현 손자 최면식(崔勉植)이 대한 광복회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최면식은 1916년 입단하여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펼치다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범영(李範英)은 신민회 계열의 비밀 단체인 대동 청년단에 가입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1920년 귀국 후 민족 교육에 힘썼다. 박동완(朴東完)은 목사로서 3·1 운동 당시 민족 대표로 참가했고 이후 만주·미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조황(趙晃)은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했고, 이주호(李周鎬)는 만주 류허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서 결성된 대한 독립단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친일 세력 처단, 무장 투쟁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 정부와 관련하여 활동한 인물들도 있다. 조영원(趙永元)은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 정부 임시 의정원 의원을 지내다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펼쳤고 한국 독립군 총사령부 참모로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민식(李敏軾)은 대한 제국 시기 육군 참령 출신으로 주비단을 결성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자금을 마련하여 후원하였다. 이치경(李致慶)은 임시 정부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이규채(李圭彩)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24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임시 의정원의 충청도 의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했고, 1930년에는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 정치부 위원 겸 군사부 참모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김영관(金榮觀)은 1944년 10월 강제 징병되어 만주의 일본군에 배속되었지만, 1개월 후에 탈출하여 1945년 2월부터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광복군 제2지대 강남 분대원으로서 초모 공작을 벌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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