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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576
한자 日帝强占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포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이계형

[정의]

1910~1945년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치 시기 경기도 포천 지역의 역사.

[개설]

일제 강점기의 경기도 포천 지역의 역사를 주요 기관, 항일 독립 운동, 청년회와 소년 단체의 활동,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과 농민 운동 등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주요 기관]

1. 교육 기관

1911년 7월 경기도 포천에 처음으로 포천 공립 보통학교가 설립되었지만, 1개 공립학교만 설치한다는 방침에 따라 1906년 설립되어 포천을 대표했던 사립 학교 신야 의숙(莘野義塾)이 1911년 9월 폐지되었다. 이후 1920년부터 송우[1920]·일동[1922]·영북[1924]·내촌[1930]·관인[1930]·가산[1931]·이동[1933]·신북[1934]·청성[1935]·이곡[1938]·금주[1941] 등 11개의 보통학교와 1930년대 화현·직동·삼정 등 3곳의 간이 학교, 외북 분교[1940] 등이 설립되었다.

2. 관공서와 금융 기관

1910년대 중반 이후 경기도 포천 지역에는 관공서와 금융 기관이 들어섰다. 먼저 1916년 2월에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에 있던 양주 헌병대 포천 분견소가 포천 경찰소로 바뀌어 포천 군민들을 탄압했고, 11월에는 경성 지방 법원 포천 출장소가 설립되었다. 1919년 12월에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영평리영평 금융 조합이 설립되었고, 1923년 7월에 소흘면 상송우리 유지들이 포천 근검 저축사를 설립했으며, 1926년 3월에는 경기도 포천군 농회가 설립되었다.

[항일 독립 운동]

1. 비밀 결사 운동

1910년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은 국내 항일 투쟁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나 경기도 포천에서는 여전히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고 1912년 9월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던 의병장 전성근(田聖根)이 피체되었다. 이에 항일 투쟁 독립 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거나, 국내에서 각종 비밀 결사를 통한 지하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5년 7월 대표적인 비밀 결사인 대한 광복회(大韓光復會)가 결성되었다. 대한 광복회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독립군 양성과 군자금 마련, 친일파와 일본인 고관의 처단 등을 목표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 광복회에는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참여했고,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는 최익현(崔益鉉)의 손자인 최면식(崔勉植)이 적극 가담하였다.

비밀 결사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조직되었는데 때로는 유사 종교가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포천의 이종학(李鐘學), 정태순(鄭泰舜) 등이 조직한 청림교(靑林敎)였다. 이들은 겉으로는 종교를 표방했지만,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의 기운을 틈타 간도 출병을 기도하다가 일제 관헌에 발각되어 불온사상 유포죄로 구금되었다.

2. 3·1 만세 운동

일제의 무단 통치에 대한 항거는 1919년 거국적인 3·1 운동으로 표출되었다.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3월 13일 오전 11시에 포천 공립 보통학교 3, 4학년생들이 일본 교원의 눈을 피해 학교 뒷산에 올라가 독립 만세를 외쳤다. 경기도 포천에서 처음으로 3·1 운동의 함성이 울려 퍼진 것이었다. 같은 시각 영중면(永中面)영평 공립 보통학교에서도 시위운동이 기도되었다. 3학년생인 정수환(鄭壽煥)이 동맹 휴학과 시위운동을 준비했으나 일본 교원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학생들의 활동은 비록 대중들과 결합되지는 못했지만 3·1 운동이 경기도 포천 지역으로 확산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3월 24일에는 경기도 포천군 영중면 영평리소흘면 송우리에서 만세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영평에서는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독립 만세 시위운동과 함께 군청 사무소를 습격하여 친일 면장을 응징하고 영평 헌병 분견소도 공격하였다.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송우리 주민 600여 명도 시위운동을 전개했으나 송우리 헌병 분견소 헌병 경찰들의 총검에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다. 3월 29일에는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무봉리군내면 유교리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3월 30일에는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한 시위가 일어났다. 이날 시위는 경기도 포천 각지의 주민들이 한 곳에 모여 일으킨 연합 시위로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일동면·이동면·영중면 주민 2,000여 명이 신북면 사무소 앞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인 것이었다. 시위대는 출동한 일본 헌병 경찰과 충돌했고 일본 헌병 경찰은 시위 군중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현장에서 3명이 순국하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3명이 체포되었다. 그래도 시위대는 굴하지 않고 일본 헌병 경찰들에게 투석으로 맞서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4월 1일에는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과 기산면 주민 2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였고, 4월 3일에는 일동면 장암리 주민 500여 명과 노곡리 주민 400여 명이 각각 시위를 전개했으며, 신북면 삼정리에서도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4월 4일에는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자일리에서 안응건(安應乾)이 만세 시위운동을 기도했지만 일본 헌병 경찰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청년회와 소년 단체 활동]

1. 청년회

1920~1930년대에는 각지에 청년회와 소년 단체가 결성되어 노동 야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청년회의 사업 중에 가장 긴급한 과제는 지식 보급, 덕육 사업, 산업 장려 등이었는데, 지식 보급을 위한 청년회 활동이 바로 야학 활동이었다. 당시 경기도 포천 지역의 청년 단체로는 포천 청년회, 포천 산업 청년회, 송우 청년단, 포천 엡윗 청년회, 포천 의법 청년회, 신촌 청년회 등이 대표적이었다.

청년 단체들이 포천 지역의 노동 야학을 얼마만큼 주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농민 계몽, 운동 대회 개최 등에 관한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것으로 보아 노동 야학도 적극적으로 주도했을 것으로 보인다. 노동 야학은 각지의 유지들과 주민, 종교 단체들에 의해서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포천 노동 야학, 양문 노동 야학(梁文勞動夜學), 유정 노동 야학(楡亭勞動夜學), 갈월리 동기 야학(冬期夜學), 갈기 노동 야학·용정 노동 야학(龍井勞動夜學) 등이 대표적인 노동 야학이었다.

2. 소년 단체

소년 단체로는 우선 1925년 5월 경기도 포천군 소흘읍 송우리조선 소년군 송우 제10호대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1928년 3월에는 포천 소년회가 조직되어 ‘참된 사람이 되자, 배우며 일하자, 선을 위하여 싸우자, 대중의 종이 되자’ 등의 강령을 내걸었다. 또한 1930년 9월에는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유교리의 명신 학원에서 명신 소년회가 조직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과 농민 운동]

1. 일제의 식민지 수탈 정책

1914년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이 실시되면서 경기도 포천군은 1915년 1월까지 토지를 신고했고, 1916년 11월 토지 대장 규칙에 따라 토지에 관한 사무를 취급하였다.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은 일제가 한국에 식민지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실시한 종합적 식민지 수탈 정책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임야 조사 사업도 시행하여 소유권을 정리하는 한편, 국유림을 요존(要存) 국유림과 불요존 국유림으로 구분하고 불요존 국유림은 대부분 일본인에게 대부·양여하는 약탈적 정책을 시행하였다. 경기도 포천 지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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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경기도 포천 지역의 금광·은광 등의 광업권도 상당수가 일본인에게 넘어갔다. 일제는 이미 1906년 6월 29일에 「광업법」을 공포하고 7월 24일에는 「사광 채취법」을 공포하여 내외국인에 대해 균등한 광업권 향유의 기회를 부여했는데, 이는 일본인의 조선 광업에 대한 진출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1915년에는 「조선 광업령」을 제정·공포하여 일본인 이외의 외국인의 광업권 취득을 금지하였다. 일본 자본에게 광업권 독점의 길을 열어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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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농민 운동

1920년대 이후 식민지 지주와 소작 농민들 간의 소작 쟁의가 일기 시작했는데,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작 쟁의가 발생하였다. 1920년대 말 농가 대부분이 소작농이었고 절대다수가 극빈자였다. 1930년 경기도 포천군의 총 농가 호수는 9,721호였는데, 이중 자작농이 918호에 불과했고 8,803호가 순 소작농이거나 자작 겸 소작농이었다. 또한 춘궁기를 겪는 소작농 [자작 겸 소작농 포함]이 약 73%에 달하였다.

경기도 포천지역은 일본인 대지주[농장·농업 회사 포함]들이 많이 진출해 토지 겸병이나 농민 수탈이 심한 곳이었다. 일본인 지주나 농장에 소속된 소작 농가가 415호에 이르렀다. 따라서 소작 쟁의가 많이 발생하였다.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소작 쟁의는 1934년 6건, 1935년 50건, 1936년 35건이 발생하였다. 이는 규모가 큰 소작 쟁의만 조사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1919년에는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심곡리 일대에 심곡 수리 조합(沈谷水利組合)이 설립되었고, 1922년에는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자일리·운천리의 일대에 영북 수리 조합이 설립되었다. 두 수리 조합은 설치 당시부터 많은 폐해를 일으켰다. 관련 지역 주민의 의사와 지형을 무시하고 몇몇 대지주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추진되었고, 조합 측의 무리한 계획과 부실 공사로 지역 주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고스란히 일반 조합원의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심곡 수리 조합은 일본인 대행 업자가 예산 부족 등을 이유로 공사를 중단하여 2만 6500여 원의 공사비를 추가로 부담해야 했고, 겨우 완성되었지만 시설이 부실하여 폐해가 잇따랐다. 영북 수리 조합은 많은 공사비를 들여 완성했지만 설계 미비로 수원이 모자라 다시 보조 저수지를 신설해야만 했다.

부실 공사는 대개 조합 측과 대행 기관의 부정, 비리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증가된 사업비는 결국 조합원이 부담해야 했고 지가까지 폭락하여 이중의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심곡 수리 조합의 지가 변동 상황을 살펴보면 논의 경우, 사업 전에는 1반(反) 당 상답(上畓) 250원, 중답(中畓) 200원, 하답(下畓) 150원이었는데 사업 후에는 상답 160원, 중답 120원, 하답 60원으로 크게 폭락하였다.

이에 포천의 심곡 수리 조합영북 수리 조합 지역에서 주민들의 수리 조합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중소 지주를 포함한 지역 전체 주민이 반대 운동에 참여했고, 군청에 진정서를 내거나 대표자가 상경하여 총독부에 직접 진정도 하였다. 심곡 수리 조합은 지주[자작농 포함]들에게 하등의 이익이 없었고 부채만 가중시킬 뿐이었다. 따라서 지주들은 설립 당시부터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청이 지주들을 회유하려고 하여 지주와 군청과의 분란이 계속되었고 갈수록 반대의 기세가 높아갔다고 한다. 이를 통해 당시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 수리 조합 반대 운동이 격렬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타]

1914년 3월 일제의 부·군의 통폐합 정책에 따라 영평군과 통합하였다. 1916년 12월에는 청평~포천 간 27번 도로가 놓였고, 1917년 6월에는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인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의 신륵사(新勒寺)가 폐지되었다. 1918년 1월에 경기도 포천군 청산면 금동리에 있는 지동리 남감리 교회 강의실이 폐지되었으며, 1922년 1월에는 우체부가 직접 배달하던 우편물을 의정부 포천 간 우편 자동차로 운반하게 되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의 소위 ‘문화 통치’에 따라 1920년 『조선 일보』와 『동아 일보』가 발행되었고, 1923년 8월에 경기도 포천군 서면 신읍리에 동아 일보 포천 분국이 설립되었다. 1926년 5월 경기도 포천군 군내면 구읍리에서 월간지 『포천 잡지』가 창간되었고 1927년 10월 포천 동아 일보 지국 기자들이 순보 『포천』을 발행하였다.

1930년대 말 이후로 쌀 수확이 여전히 평년작에 미치지 못하고 중일 전쟁도 장기화되자, 조선 총독부는 필요한 쌀 수량을 도에 과잉 할당하여 도지사 책임 하에 농민들로부터 쌀을 공출하도록 하였다. 1940년 2월 경기도 포천 지역에서는 곡물업자들이 중심이 되어 포천군 신읍에 잡곡 2만석을 목표로 식량 배급 조합을 창립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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