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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034
한자 改新敎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포천시
집필자 박경자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한 분파.

[개설]

한국에 개신교를 전파하려고 했지만 1816년 영국 출신의 홀, 1832년 독일 태생의 구츠라프, 1866년 영국의 토마스, 그리고 1867년 스코틀랜드의 윌리암슨 등이 의해 처음으로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이후 1873년 조선 선교에 뜻을 두고 만주에 진출한 스코틀랜드 일치 자유 교회 출신의 로스와 그의 매부 매킨타이어가 의주 출신의 이응찬·이성하·김진기·서상륜 등에게 성서를 가르치면서 성서 번역에 착수하였고, 1876년에 이들을 개신교에 입교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1882년에 『예수셩교 누가복음 전서』를 번역 완료하여 간행하였으며, 1887년에 『예수셩교젼서』라는 신약 성서 전부를 간행하였다. 한편, 전직 통리아문 협판 이수정은 1882년 수신사 박영효 일행에 끼어 일본으로 건너가 이듬해에 기독교에 입교하였고, 1885년에 그가 번역한 『신약 마가전 복음서 언해』를 요코하마에서 간행하였다.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계기는 1882년 5월에 체결된 한미 통상 수호 조약이었다. 이 조약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지만 학자들을 보내 언어·문화·예술을 연구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되었고, 일본에 와 있던 선교사들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조선 선교의 기회로 삼았다. 또한 일본에 유학하면서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인 조선인들도 미국 선교사들에게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라고 요청하였다.

이 상황에서 미국의 북장로교가 먼저 시작했고, 북장로교에서 파송된 의료 선교사 알렌이 1884년 9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알렌은 민씨 일파의 신임을 얻어 1885년 4월 서울에 광혜원을 열었다. 같은 달에 북장로교의 선교사 언더우드와 북감리교의 아펜젤러가 인천에 도착하였다. 5월에는 북감리교의 선교사 스크랜턴이 아내 및 어머니와 함께 도착하였다. 1886년 스크랜턴의 아내인 메리 F. 스크랜턴(Mary F. Scranton)이 이화 학당을 세웠으며, 아펜젤러는 배재 학당을 세워 여름부터 개교하였다. 아펜젤러는 1887년 10월 정식으로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한국 최초의 감리 교회인 정동 교회를 세웠다.

그 후 미국 남장로교[1892], 남감리교[1895], 성공회[1891], 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 선교부[1889], 캐나다 장로교[1893], 침례교[1889], 제칠일 안식교[1904], 성결교[1907], 구세군[1908] 등의 교파가 선교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한국에는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두 줄기의 큰 흐름으로 선교가 이루어졌다.

1889년 한국에 들어온 장로교 선교부들은 서로 협력하여 선교하기로 의견을 같이하여 장로교 연합 성교 공의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남장로교와 캐나다 장로교회가 여기에 가입하였다. 장로교 연합 성교 공의회는 1901년부터 실질적인 한국 장로교회의 최고 기관이 되었다. 이에 비해 감리교의 경우, 남북 감리 교회가 연합 조직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사안에 따라 서로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감리 교회가 하나로 통합된 것은 1930년대의 일이었다. 감리교는 선교 역량을 교육과 부녀 사업에 쏟았고, 장로교는 네비우스 방법이라는 토착과 자립 원칙의 선교 정책으로 서북 지방의 선교를 추진하였다. 구세군은 처음부터 사회봉사와 자선 사업에 치중했고, 침례교는 만주와 시베리아 지방으로 진출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개신교는 을사조약 체결 이후 민족적 운명이 위태로운 시기에 전국적인 부흥 운동을 벌여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한국 개신교도들이 탈정치화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도 민족주의적 입장보다 종교적 정체성을 훼손당하지 않기 위해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전개한 것도 이런 흐름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개신교는 1920년대부터 한국에 보급된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 입장을 표방하였다. 개신교의 이러한 반사회주의 경향은 해방과 남북 분단 이후 반공의 국시화를 표방한 남한 정권의 정당화에 기여하였다.

그 와중에 장로교는이러한 교파 분열 흐름이 확대되어 진보 측과 보수 측이 갈등하면서 1953년 기독교 장로회와 예수교 장로회로 분열했으며, 감리교 역시 1954년 내부 문제로 분열하였다. 그 후 개신교에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교파가 생기게 되었다. 한편, 교파 분열 현상과 동시에 박태선의 전도관, 문선명의 통일교 등과 같은 개신교 계열의 신종교도 등장하였다.

[개신교의 포천 지역 전파]

경기도 포천에 개신교가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영중면 영평리였고 처음 들어온 교파는 감리교였다. 감리교가 포천 지역에 먼저 들어온 것은 개신교가 한국에 전파되어 선교 지역을 확장해가던 1892년부터 1909년 사이에 미국 감리회와 북장로회가 맺은 선교지 분할 협정 때문이었다. 그 결과 서울·평양·원산 등 세 도시는 공동 선교 지역, 경기·충청·강원 등 중부 지역은 남·북감리회와 남·북장로회의 분할 선교지가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황해도 지역은 북장로회와 미감리회, 함경도는 캐나다 장로회, 경상북도 지역은 북장로회, 경상남도 지역은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전라도 호남 지방은 남장로회가 각각 선교를 맡기로 하였다. 따라서 포천을 비롯한 경기 북부 지역 일대는 감리교의 선교 지역에 포함되었다. 선교 지역 분할은 약 30년간 지속되었다.

포천 지역 선교를 처음 시작한 인물은 1908년 서울에서 감리교 전도사로 영평에 파견된 김영환이었다. 김영환이 처음으로 전도한 사람은 이양수·박문오·이재원·신정록 등이었고, 이들은 영평리 산 밑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다. 이후 1921년에 이르러 그동안 교회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던 김재선(金在璇) 전도사가 윤원식(尹元植)의 특별 헌금과 신중여·김중흡 등의 협력으로 마련된 선교회 보조금을 합쳐 영평 교회를 세우고 포천 기독교 조선 감리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교회 건물은 6·25 전쟁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초 포천의 대표적인 교회는 영평 교회, 포천읍 교회, 포천 용상동 교회[포천 이동교리] 등이다. 1924년 4월에는 차석환(車錫煥)의 재정 지원과 사일환(史一煥)의 토지 기부로 경기도 포천군 소흘면 이동교리에 축석교회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이들 교회를 중심으로 여러 활동이 펼쳐졌다. 대표적인 것이 포천 엡윗(Epworth) 청년회의 활동이다. 엡웟 청년회는 1889년 미국에서 창설된 감리교 청년 단체이다.

포천 엡웟 청년회는 1920년대 야학 운동을 이끌었다. 포천 용상동 교회 엡웟 청년회의 오상근·김재선·외혜선·이정옥 등이 일반 노동자의 교육을 위해 노동 야학교를 설립하고 한문·한글·산술·일어 등을 가르쳤다. 이와 함께 포천 유지 김종석(金鍾昔)도 포천 교회 내에 노동 야학을 개설하고 취학하지 못한 노동 청소년 20여 명을 모아 일어·산술·한글·한문 등을 가르쳤다. 포천 신읍리 감리 교회는 1935년 7월부터 아동의 종교 교육과 문맹 타파를 위해 하기 성경 학교를 개설하였다.

포천 엡웟 청년회는 각종 토론회, 강연회 등도 개최하였다. ‘사회 발전은 남자 교육이냐 여자 교육이냐’, ‘사회를 향상케 함에는 과학이냐 종교이냐’, ‘가정의 평화를 유지함에는 남자냐 여자냐’ 등의 토론회를 영평 교회에서 개최했으며 가극 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포천 용상동 교회 엡웟 청년회는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여 ‘우리의 자각’, ‘우리는 어찌하여 타인과 같은 대우를 받을까’ 등의 각종 강연회를 개최하여 주민을 계몽시키고자 하였다.

한편 구읍 예배당에서는 1927년 9월 감리교 여선교부와 한인수(韓寅洙)·김종국(金鍾國) 등의 지원으로 포천 유치원이 설립·운영되었으며, 포천 신읍리 감리 교회에서는 1936년 3월 여선교부가 일반 가정주부들을 위한 부인 가사 강습회를 개최하여 요리·제과·재봉·염색·세탁 등을 가르쳤다.

[해방 이후의 포천 개신교]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포천 지역의 개신교는 잠시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포천 북부의 3·8선 이북 지역이 북한 치하로 넘어가면서 교회들이 폐쇄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이후 1954년 5월 수복이 이루어지면서 박중흡(朴重洽) 전도사 등이 불탄 자리에 천막으로 된 예배 처소를 마련하여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다.

포천 지역 내에는 6·25 전쟁 전까지만 해도 장로교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6·25 전쟁 이후로 각지에서 장로교인이 이주해오면서 장로교가 생겨나게 되었다. 포천 지역에 장로교회가 생긴 과정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포천 감리회 예배당에서 같이 예배를 보던 장로 교인인 유보옥·길병준·최인순 등이 1953년 6월 유보옥의 집에서 유보옥의 남편이었던 이수남 집사와 함께 별도로 예배를 보았다. 여기서 네 사람이 교회 발족을 결정하고 그 명칭을 대한 예수교 장로회 포천읍 중앙 교회라고 하였다. 같은 해 6월 16일에는 길병준 집사가 포천읍의 도립 병원에서 얻은 천막을 신읍리 175번지에 설치하여 임시 예배당을 마련하였다. 당시 예배 인원은 7명이었다고 한다.

한편 포천 지역에는 감리 교회나 장로교회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과 안식일 교회 등도 자리를 잡기 시작했는데, 이는 경기도 포천 지역에 주둔했던 미군 병사들의 전도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포천 개신교 현황]

1990년대 중반 경기도 포천 지역에는 장로교 84개, 감리교 26개, 안식일교 5개, 순복음교 3개, 침례교 2개, 성결교 5개, 여호와의 증인 왕국 회관 4개, 구세군 1개 등 130여 개의 개신 교회가 있었다. 신도 수는 1만 2000명 정도로 포천 지역 총인구의 10%를 차지하였다. 그 중 장로교 신도가 6,900명으로 가장 많다. 다음으로 감리교 신도가 많았는데 약 3,600명 정도였다. 그 외에는 대부분의 교회가 100명 미만의 신도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30명도 채 안 되는 영세 교회도 상당수였다. 도시화가 진행된 포천 시내와 소흘읍 지역의 교회에는직장에 다니는 신도가 많았다. 그에 비해포천 북부 지역의 교회는 대부분의 신도가 농민인 전형적인 농촌 교회였다.

포천군 총인구의 10%라는 교세에 비해 포천 지역 소재 개신 교회의 역사는 비교적 짧다. 감리 교회와 몇몇 장로교회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교회가 1970년대 말~1980년대에 들어선 개척 교회였다. 주로 성결교, 침례교, 순복음교, 재림교, 통일교 등의 교회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개척 교회들은 개척 단계에서 마을 정착 단계로 접어드는 시점까지 상당한 정체 현상을 보였다. 원인은 지역 주민의 실정에 맞는 신앙 프로그램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교회들은 지역민과 소통하면서 교세를 넓혀 갔다. 이때부터 소규모로 경로잔치, 맹인 방문 선교 등의 사회봉사 활동을 벌여온 교회가 상당히 많다. 노인 관광을 후원한 소흘면 직동 장로교회, 마을금고를 운영하고 탁아소·컴퓨터 교실·어버이날 경로잔치를 여는 가산면 금현 장로교회, 도서실 문고를 운영하는 신북면 신북 감리 교회, 요양원 후원 사업을 벌이고 있는 포천읍 안식일 교회 등이 좋은 예이다. 또한 규모가 큰 포천 감리 교회나 운천 감리 교회, 일동 감리 교회, 포천 장로교회, 송우 장로교회 등도 노인잔치, 장애인 후원 사업, 의료 선교 사업 등을 펼쳐오고 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개신 교회는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2012년 현재 260여 개로 1990년대 중반에 비해 약 2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교파는 장로교[145개], 감리교[38개], 성결교[13개], 순복음교[10개] 등인 것으로 집계된다. 지역별로는 소흘읍이 71개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포천 시내 50개, 일동면 24개, 신북면 21개, 가산면 18개 등의 순이다. 화현면이 3개로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도시화의 정도에 따라 개신 교회의 증가 속도가 다르게 나타난 듯하다.

한편, 포천 지역에는 지역 교회의 영세성에 비해 기도원의 비중이 큰 편이다. 1980년에 문을 연 경기도 포천시 포천읍 선단리 소재 포천 할렐루야 기도원, 1985년부터 시작된 영중면 성동 4리 한국 중앙 기도원을 비롯해 2012년 현재 22개소의 기도원이 포천 지역 산중에 들어서 있다. 그중 포천 할렐루야 기도원은 신도 수가 1,700명에 이르며 전국에 10개의 기도원을 보유한 전국적인 수준의 기도원이다. 포천하면 산정 호수, 이동 갈비와 더불어 기도원을 떠올릴 만큼 포천은 대표적인 기도원 밀집 지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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