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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000041
한자 衣生活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기도 포천시
집필자 김진호

[정의]

경기도 포천지역 사람들이 착용해 온 의복 및 이와 관련한 생활 풍속.

[개설]

포천 지역 주민의 의생활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북부 외곽 도시라는 입지적 여건으로 서울과 비슷한 맥락을 안고 있다. 한 예로 초상이 났을 때 여자의 친정에서 상복을 마련해 오는 것을 ‘거성’이라고 하거나, 첫 친정 나들이에서 시댁으로 돌아올 때 시어머니나 시할머니에게 주머니와 허리띠를 드리는 ‘중동풀이’는 서울을 포함한 경기 지역에서 나타나는 풍습이다.

경기도는 서울과는 달리 빈부(貧富)차나 계층에 따라 토착성(土着性)이 나타나고 있으며, 반상(班常)의 구별이 뚜렷하게 반영되고 있는 면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의례복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옷의 기본 형태를 벗어나지 않았다.

[변천]

사계가 뚜렷하고 일교차가 심한 한반도의 자연 환경을 고려하여 한민족의 조상들은 겨울에는 찬바람과 추위를 막아 주는 따뜻한 견직물과 모직물을 즐겨 입고, 여름에는 덥고 습윤한 기후에 견딜 수 있는 통기성과 땀을 잘 흡수하는 삼베와 모시를 즐겨 입었다.

삼국 시대 이후로 남자는 통이 넓은 바지와 길이가 둔부까지 내려오는 저고리를 즐겨 입었으며, 부녀자는 통이 넓은 바지와 품이 넓은 치마, 둔부까지 내려오는 저고리를 즐겨 입었다. 삼국 시대의 남자는 머리에 깃을 꽂거나 건을 쓰거나 관을 썼고, 부녀자는 머리를 틀어 올려 쪽을 찌고, 미혼 남녀는 머리를 땋아 늘어뜨려 장식을 하였다.

고려 시대에 들어와서 남자는 복두를 즐겨 쓰고, 미혼 남녀는 머리를 땋아 늘어뜨려 처녀는 빨간 댕기와 검은 띠를 매었다. 고려 말 문익점(文益漸)[1329~1398]이 원(元)나라에서 목화씨를 갖고 와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부터 면화 재배가 확산되기 시작하여 조선 전기에 이미 목면(木棉)이 크게 유행하였다. 목면의 대량 생산은 서민의 의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방한복에 솜을 집어넣어 따뜻하게 입을 수 있게 하였다. 고려 말에 이르러 남자는 외출을 할 때 흑립과 방갓을 쓰기 시작하였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외출할 때 성인은 상투를 쫓고 망건을 두른 후 갓을 쓰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여자의 쪽머리가 확립된 것은 서기 1800년 무렵 이후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 말 이후로 여인의 머리 장식은 개화기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전통적으로 서민의 의생활은 여름에는 주로 삼베와 목면을 즐겨 입었고, 봄가을에는 목면을 즐겨 입었으며, 겨울에는 목면에 솜을 넣어 누빈 겹옷을 즐겨 입었다.

반면에 부유한 사람은 여름에는 삼베와 모시옷을 즐겨 입었고, 겨울에는 명주에 솜이나 털을 넣어 누빈 옷을 즐겨 입었으며, 여름에는 옷이 몸에 착 달라붙지 않도록 ‘등잠’을 걸치고 ‘토시’를 낀 후에 겉옷을 입었다. 양반은 여름에도 버선을 신고 미투리나 갖신을 신었으며, 서민은 맨발에 짚신을 신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머리에 우장을 덮어 썼고, 나막신을 신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겨울에 남자는 방안에 있을 때 마고자를 즐겨 입었으며, 부녀자는 배자(褙子)를 즐겨 입었다. 외출할 때는 방한모를 쓰는데 남자는 ‘풍차’를 즐겨 썼고, 부녀자는 ‘조바위’나 ‘아얌’을 즐겨 썼다. 외출할 때는 여름에도 양반은 도포와 흑립으로 의관을 갖추었고, 부녀자는 머리에 장옷을 덮어 쓰고 외출을 하였고 외간 남자와 마주치면 얼굴을 피하였다.

[일상복]

남자의 일상복은 주로 바지와 저고리였다. 외출할 때에는 속적삼, 속곳, 바지, 저고리, 조끼, 두루마기를 갖추어 입었다. 여성의 경우 전통 시대의 옷은 치마와 저고리였다. 외출복 역시 치마, 저고리였지만 옷감이나 색이 평상복과 달랐다. 부잣집에서는 여벌의 옷을 많이 갖추었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따로 외출복을 갖추기가 어려웠다. 1960년대 이후에는 집에서 옷을 해 입는 경우가 많지 않고 기성복을 사서 입었다. 기성복은 주로 양복으로 남자의 경우 바지와 셔츠, 재킷이나 점퍼를 주로 입었고, 여자는 치마와 블라우스, 원피스 또는 남자처럼 바지를 입기 시작하였다.

[의례복]

의례복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치르게 되는 여러 차례 크고 작은 의례를 행할 때 그에 맞게 갖추어 입는 복식을 말한다. 출생복은 생후 처음 입는 옷으로 보통 면이나 부드러운 무명으로 만들었다. 부유한 집에서는 명주를 쓰기도 했다.

혼례복으로 신랑은 안에 적삼과 속곳을 입고, 명주로 만든 바지, 저고리, 두루마기를 입은 뒤 사모관대(紗帽冠帶)를 갖추었다. 서민의 경우 혼례복은 갖춰서 준비할 수는 없었고 마을 내 부잣집에서 빌려 입었다고 한다. 신부는 우선 속적삼, 속치마를 입고 다홍치마, 초록 저고리를 입은 뒤 원삼을 입었다. 머리에는 비녀를 꽂고, 족두리를 쓴 다음에 얼굴에 연지·곤지를 발랐다.

수의(壽衣)는 과거에는 집집마다 직접 만드는 일이 많았다. 수의 감으로는 삼베를 주로 썼다. 최근에는 부모의 수의나 자신이 입을 수의를 직접 만드는 일은 없고 전문 한복집에 주문하거나 수의를 파는 상인에게 주문하기도 한다. 수의를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부모상을 당하면 장의사나 병원에서 준비한 수의를 사용한다.

[현황]

1900년대 전후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고유의 전통 생활 풍속과 의식이 말살되어 가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 시기는 의생활에서 고유 한복의 생활 영역이 점차 쇠퇴하는 시기였으며, 광복과 6·25 전쟁 이후 신식 학교 교육과 기계화한 의료(衣料) 생산의 발달에 의해 양복을 주로 입게 되었다. 지금은 전통 한복은 명절이나 예식 등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에만 입는 옷이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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