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50037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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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海兵隊盈德地區戰鬪 |
영어공식명칭 | Battle of Yeongdeokjigu, Marine Corps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영덕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용성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51년 1월 30일 - 해병대 영덕지구 전투, 공비 소탕을 위해 해병대 출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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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51년 2월 9일 - 해병대 영덕지구 전투, 동대산 점령 |
발생|시작 장소 | 황학산 - 경상북도 영덕군 |
종결 장소 | 동대산 -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회리 |
성격 | 전투 |
관련 인물/단체 | 해병대 |
[정의]
1951년 1월 29일부터 2월 23일까지 한국 해병 제1연대가 경상북도 영덕에서 치른 공비 토벌 작전.
[개설]
6.25전쟁이 발발하고 6개월이 지난 시점에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세가 있었다. 중공군의 공세에 유엔군은 밀려 1951년 1월 4일에 서울을 다시 내주고 그곳에서 60㎞ 남쪽의 오산과 삼척을 잇는 선까지 후퇴하였다. 이 무렵 경상북도 영덕 일대 산악 지역에서는 북한군의 유격대가 준동하고 있었다. 북한군의 준동에 한국군 해병 제1연대는 25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8명을 사살하고, 북한군의 근거지를 완전히 제거하였다.
[역사적 배경]
해병 제1연대는 9월 15일에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뒤 28일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해병 제1연대는 중공군이 전쟁에 개입하자 1951년 초에 유엔군과 함께 후퇴하면서 경상남도 진해로 철수하였다. 이 무렵 경상북도 영덕·안동·영주 지구에서는 북한군의 패잔병들과 지역 출신의 공비들이 경찰서를 습격하고 식량을 약탈하고 살인과 납치를 하는 등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경과]
해병 제1연대는 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하여 1951년 1월 26일에 영덕군 강구면 하저리에 상륙하였다. 연대장은 1월 30일에 부대 배치를 마친 뒤 황학산 북쪽 3㎞ 지점에 나타난 400명의 공비를 소탕하기 위하여 병력을 출동시켰으나 역부족으로 고전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공비들이 연대본부를 습격하여 1개 소대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러던 중 해병 제1연대로 귀순한 북한군 패잔병 1명이 “항동에 집결해 있던 공비 2,000여 명이 2월 7일에 동대산으로 숨어들어가려고 한다.”라고 진술하였다. 북한군 패잔병의 진술에 연대장은 하루 전인 2월 6일 12시에 제1대대와 제2대대를 남정면 동대산으로 투입하였다. 공격 부대들은 먼저 동대산의 서쪽 고지인 팔각산을 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다음 계속 전진하여 9일 오후 4시 무렵에 동대산을 점령하였다.
[결과]
해병 제1연대는 8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공비들의 근거지를 제거함으로써 영덕지구의 치안을 완전히 확보하였다. 영덕지구의 치안을 확보한 후 해병 제1연대는 강원도 영월·홍천·화천 지구 등을 점차 점령해 가면서 6월 1일에는 양구 서남방까지 북진하였다. 6월 19일에는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도솔산을 탈환하였다.
[의의와 평가]
해병대 영덕지구전투는 북한군의 비정규전 부대를 해병 제1연대의 자체 독립 작전으로 소탕하여 치안을 확보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