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7011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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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川里鶴峰旗告祀 |
영어공식명칭 | Sacrificial Rite for the Farming Flag of Geumcheonri Hakbong villiage |
분야 |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금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민정희 |
의례 장소 | 금천리 학봉 기고사 -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금천리 넓은 공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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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고사 |
의례 시기/일시 | 음력 정월 열나흗날 |
신당/신체 | 농기 |
[정의]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금천리 학봉에서 음력 정월 열나흗날 농기를 세우고 풍년을 비는 고사.
[개설]
세종특별자치시 금남면 금천2리 학봉의 기고사는 해마다 음력 정월 열나흗날 해가 진 뒤에 농기(農旗) 앞에서 지낸다. 마을에서는 한 해 농사의 풍년을 빌고 마을 전체의 안과태평을 비는 뜻에서 농기에 정성을 드린다.
[연원 및 변천]
마을사람들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농기는 광복 무렵에 제작한 것이다. 당시 연기군 내 마을을 대상으로 농악대회가 열렸고, 학봉에서도 농악단을 꾸려 대회에 참가하였다. 농악단은 기량이 뛰어나 대회 우승을 하였고, 부상으로 농기를 받았다. 깃발에는 ‘신농(神農)’이라는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은 지금도 정해(丁亥)년에 농기를 타 온 것으로 기억한다. 정해년은 서기 1947년이다. 정해년 이전에도 기고사를 지낸 풍속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정해년의 농악대회를 계기로 헌 농기가 새 농기로 교체되었다. 세월이 흘러서 정해년의 농기는 없어졌지만 정월에 세우는 농기는 1989년[기사년]에 새로 장만한 것이다.
[절차]
정초가 되면 마을은 풍물소리로 요란하다. 풍물패가 음력 정월 초사흗날부터 가가호호 다니면서 터를 눌러 땅의 기운을 다져 주었다. 가정에서는 풍물패가 들어오면 마당에 고사상을 차리고 쌀을 내놓았다. 걸립(乞粒)[집단이나 마을에서 경비를 쓸 일이 있을 때 풍물을 치고 다니면서 축원을 해 주고 돈과 곡식을 얻는 일]하여 모은 제비로 기고사 제물을 마련하였다. 농기는 한 집을 정하여 바깥마당에 세웠다. 기는 가능한 한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넓은 공터에 세웠다. 기고사 제물 준비를 맡은 집에서는 정월 열나흗날 해가 지면 정성껏 흰시루[백설기]를 찐다. 흰시루 외에도 제물로 북어, 대추, 밤, 곶감, 술 등을 준비한다.
해가 지면 농기 앞에 상을 갖다 놓는다. 상 위에는 떡을 시루째 놓고 시루 손잡이 양쪽에 북어대가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한 마리씩 꽂는다. 떡시루 가운데에는 불밝이쌀을 놓고, 촛불을 환히 밝힌다. 시루 앞에는 대추·밤·곶감 등을 올리고, 청수도 한 그릇 떠놓는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제관 일행은 유교식으로 경건하게 기고사를 지낸다. 초헌관이 첫잔을 올리고 축관이 독축(讀祝)한다. 독축 후에 아헌(亞獻)[두번째로 술잔을 올리는 일]-종헌(終獻)[세번째로 술잔을 올리는 일]을 하고, 모인 사람 중에서 정성을 드리고 싶은 이들은 앞으로 나와서 잔을 올린다. 제관은 마지막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소지(燒紙)[종교 및 신앙 목적으로 종이를 태우는 행위]를 올려주면서 건강하고 재수가 있길 축원하였다. 소지가 잘 타서 올라가야만 한 해 동안 운수가 좋을 것으로 여겼다.
정성을 드린 뒤에 음복(飮福)한다. 과거에는 떡을 얻어먹으려는 아이들 성화에 줄을 세우는 일도 있었다. 아이들은 귀한 떡을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앞다투어 줄을 섰다.
정성을 드린 뒤에도 기는 곧바로 걷지 않고 열흘간 그대로 세워 놓는다. 시간이 지나서 눈비에 젖은 깃발은 햇볕에 잘 말려서 보관하고, 깃대는 큰 집 처마 밑에 매단다.
[현황]
오늘날도 학봉에서는 음력 정월 열나흗날 해가 진 뒤에 농기를 세우고 기고사를 지낸다. 주민들은 농기 앞에서 한 해 농사의 풍년을 빌고, 마을 전체의 안과태평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