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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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東臣 |
영어공식명칭 | Gim Dongsin |
이칭/별칭 | 원표(元表),청암(淸庵)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만오 |
[정의]
근대 무주 출신의 의병장.
[활동 사항]
김동신(金東臣)[1871~1933]의 자는 원표(元表), 호는 청암(淸庵)이다. 지금의 대전광역시에서 출생하였다. 고종(高宗) 때 무과에 급제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승(祕書丞)을 지냈다. 1905년(고종 42)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문태서(文泰瑞), 신명선(申明善), 박춘실(朴春實) 등과 함께 구국 항쟁의 대열에 나서기로 하고 무주군 안성면에 있는 원통사(圓通寺)를 근거지로 삼고 항일 투쟁을 벌였다. 1906년 봄 최익현(崔益鉉)과 민종식(閔宗植)이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자, 민종식을 찾아가 본인이 선봉장으로 전라북도에서 기병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민종식이 홍성에서 함락당한 후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김동신은 독자적으로 의병진을 구성하여 지리산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1907년(순종 1) 8월 4일 8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남원 사장(沙場)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였으며, 8월 11일에는 전라남도 구례군의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무기를 빼앗았다. 8월 17일에는 경상남도 함양군 좌전에서 적 20명과 접전하였으며, 9월 4일에는 600명을 거느리고 경상남도 안의군 월성에서 적 40명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그뿐 아니라 9월 10일 전라북도 순창의 우편 취급소와 경무고문 분파소(警務顧問分派所)를 습격하여 관물(官物)을 노획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김동신은 그 뒤로도 충청도와 강원도, 경기도 등지에서 활동한 후 민경호(閔競鎬) 휘하의 의병 700여 명을 이끌었다. 10월 27일 보은 일대에서, 10월 28일 남악동 등지에서 적과 교전하였으며, 1908년 2월에는 용담군 구랑과 무주 일대에서 적과 교전하였다. 그해 3월 6일 경상남도 거창군 매학 일대에서 적 70명과 접전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이후로 몸이 너무 쇠약해져 김동신은 더 이상의 의병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김동신은 어쩔 수 없이 고향인 회덕으로 내려가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고향으로 내려온 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은 6월 8일 일본 경찰에 붙잡혔고,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1933년 향년 63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 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