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643 |
---|---|
한자 | 求禮張氏 |
영어공식명칭 | Gurye Jangssi|Gurye Jang Clan |
이칭/별칭 | 봉성 장씨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대길 |
본관 | 구례[봉성] - 전라남도 구례군 |
---|---|
입향지 | 무주 당산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 |
세거|집성지 | 당산리 - 전라북도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 |
묘소|세장지 | 장지현 묘지 -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사천리 211 |
성씨 시조 | 장악(張岳) |
입향 시조 | 장의현(張義賢) |
[정의]
장악을 시조로 하고, 장의현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무주군의 세거 성씨.
[연원]
시조 장악(張岳)은 인동 장씨 시조 장정필(張貞弼)의 후손으로, 고려 인종 때 문하시중을 지내며 왕의 총애를 받았다. 나이 70세에 이르러 입조(入朝)할 때마다 고향인 봉성(鳳城)[현 전라남도 구례군]을 생각하고 근심이 가득하였다. 이를 알게 된 왕이 봉성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고 봉성군(鳳城君)에 봉하였다고 한다. 이에 후손들이 구례를 본관으로 하였는데, 봉성 장씨(鳳城張氏)라고도 한다.
[입향 경위]
구례장씨(求禮張氏)의 무주 정착은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무주와 가장 먼저 인연이 닿았던 인물은 만포 첨사(滿浦僉使)를 지낸 백야(栢冶) 장필무(張弼武)[1510~1574]이다. 장필무는 무주의 죽계 서원(竹溪書院)과 영동의 화암 서원(花巖書院)에 향사(享祀)되었다. 장필무의 큰아들 장의현(張義賢)은 무신으로 1583년 부령 부사로 이탕개(尼湯介)의 침입을 막아 명성을 떨쳤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장흥 부사로 전라도 방어사 이시언(李時言)의 조방장(助防將)으로 활약하였고, 1600년 호군(護軍)을 끝으로 사직하였다. 이후 “나이 70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무주 당산(堂山)[현 무주군 무주읍 당산리]에 살면서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호를 오류정(五柳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무주군에 정착한 인물은 장의현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장의현이 당산에 거주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필무의 둘째 아들 삼괴(三槐) 장지현(張智賢)[1536~1593]은 임진왜란 때 추풍령(秋風嶺)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는데, 묘지는 무주군 적상면 사천리 211번지에 있으며, 괴목리에 장지현 충신각(忠臣閣)이 있다.
[현황]
2015년 현재 전라북도에 거주하는 구례 장씨는 1,417명이며, 무주에는 128명이 살고 있다.
[관련 유적]
죽계 서원은 무주군 안성면 죽천리 평장 마을에 있다. 1713년(숙종 39)에 건립하였고, 1869년(고종 6) 서원 철폐령이 내려 헐렸으나, 1967년에 재건하였다. 사당(祠堂)은 고려 때의 명신 충간공(忠簡公) 김신(金侁)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조선 중기 충신인 백야 장필무와 장필무의 아들 오류정 장의현, 삼괴 장지현 등을 배향하고 있다. 그리고 수용(睡弁) 하징도(河徵道), 서악(西嶽) 하정도(河呈道), 취은(醉隱) 하형도(河亨道), 모정(茅亭) 하현도(河顯道) 등을 추후에 배향하였다. 장지현 충신각은 무주군 적상면 괴목리 원괴목 마을에 있고, 무덤은 무주군 적상면 사천리 신대 마을[서창]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