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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500586
한자 三公里九千洞抗日戰蹟址
영어공식명칭 Samgongri Goocheondong Hanglljeonjeokji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970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유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4년 - 삼공리 구천동 항일 전적지에 순국비 건립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88년 - 삼공리 구천동 항일 전적지 전주 대학교 박물관에서 지표 조사 실시
소재지 삼공리 구천동 항일 전적지 -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 970 지도보기
성격 항일 전적지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설천면 삼공리에 있는 일제 강점기 항일 전적지.

[개설]

문태서(文泰瑞)는 전라북도 무주군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대표적인 의병장이다. 1880년(고종 17)에 경상도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동학 운동에 관심을 갖고 가담하려 하였으나 어머니의 만류로 포기하였고, 25세가 되던 해에 금강산(金剛山)으로 들어가서 1년간 수련하였다. 1906년(고종 43) 9월에는 장수 양악 지역에서 의병진을 합세하여 장수읍을 함락시켰고 김성범을 중군장(中軍將)으로 삼아 장수 함락 때 도망간 일본군의 뒤를 쫓아 무주 구천동(茂朱九千洞)까지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당시 문태서는 잠복조를 인월담 부근에 매복시켜 청류동 계곡으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일시에 협공하여 격퇴시켰다.

1907년(순종 1)에 정미칠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문태서는 일본에 항거할 결심을 하고 덕유산(德裕山)으로 들어가서 그해 겨울에 의병을 모집하였다. 의병 200여 명을 모집하여 훈련시키던 중 무주 안성 지역의 칠연 계곡에서 활동하던 의병장 신명선(申明善)과 연합하여 일본군의 요새를 기습하여 큰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문태서는 무주 지역을 중심으로 금산, 진안 용담, 남원, 옥천, 보은, 청주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1912년 8월에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1913년 2월 4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정부에서는 1963년 2월 1일에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을 수여하였다.

[위치]

무주 구천동 관광 특구를 지나 계곡 안쪽으로 오르면 구천동 탐방 지원 센터가 나오는데, 구천동 탐방 지원 센터에서 계곡 쪽으로 1.2㎞ 더 가면 오른쪽에 삼공리 구천동 항일 전적지(三公里九千洞抗日戰蹟址)가 위치하고 있다. 1964년에 의병 대장 순국비 건립 위원회에서 항일 의병 활동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국비가 격전지였던 무주 구천동에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88년에 전주 대학교 박물관이 삼공리 구천동 항일 전적지 일대에 대한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당시 순국비의 건립 경위에 대해 기록하였다. 발굴 조사는 실시된 바 없다.

[의의와 평가]

무주 구천동 계곡은 구한말 일본군과의 전투가 이루어졌던 전적지로서 구한말 항일 의병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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