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500393 |
---|---|
한자 | 草廬亭- |
영어공식명칭 | Choryeojeong Pavilion |
이칭/별칭 | 초려정지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장기리 155-6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유철 |
건립 시기/일시 | 1657년 - 초려정 건립 |
---|---|
폐지 시기/일시 | 1967년 - 초려정 훼손 |
소재지 | 초려정 터 -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장기리 155-6 |
성격 | 정자 터 |
[정의]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장기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자 터.
[개설]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는 처음에는 지금의 상산(上山)인 산미촌(山味村)에서 살았는데, 이 터에 서재(書齋)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초려정(草廬亭)’이라 하였다. 초려정에서 매일 학자들과 학문을 연구하며 수련하였다고 한다.
이유태는 스승 김집(金集)의 천거로 1634년(인조 12)에 희릉 참봉(禧陵參奉)이 되었고, 이어 건원릉 참봉(健元陵參奉) 대군사부에 임명되었지만 나가지 않았다. 이후 1658년(효종 9)에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의 천거로 지평이 되었고, 이듬해에 시강원 진선·집의를 거쳐 현종 즉위 후 공조 참의·동부승지를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복제 시비 때 호군으로 있으면서 동문수학한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 옹호하였으며, 효종 말년 이래 적어 두었던 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시폐(時弊)를 논하고 구민(救民)·구국(救國)의 대책을 제시하였다. 이에 왕이 비변사(備邊司)에게 검토하게 하였으나 제대로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그 뒤에도 이조 참의·동부승지·우부승지·이조 참판 등이 제수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이유태는 예학(禮學)에 뛰어나 김집과 함께 『상례비요(喪禮備要)』·『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을 교감(校勘)하였으며, 특히 치국 경제(治國經濟)의 문제에서는 이이(李珥)를 모범으로 삼아 점진적인 경장론을 전개하였다. 우선 당시 민폐와 국정 동요의 근본 요인이 농민의 유리와 토지의 황폐에 있다고 보고 안정책으로 향약에 의한 향촌 조직과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의 실시, 양전(量田) 시행과 사창(社倉) 설치를 주장하였다. 또 양인(良人) 이상 자제의 취학과 15세 이후 능력에 따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선택을 역설하였다. 구체적인 변통책으로는 어염세(魚鹽稅)의 국고 전환과 면세전의 폐지, 내수사의 혁파, 부세(賦稅) 및 인역제(人役制)의 개혁, 공안(貢案)의 조정과 감축, 양전제의 개선, 관제의 개편과 합리적 운영 방안 등을 제시하였다.
이후 1674년(현종 15)의 갑인예송(甲寅禮訟) 때 복제를 잘못 정하였다는 남인 윤휴(尹鑴) 등의 탄핵을 받아 이듬해에 영변으로 유배되었다. 1680년(숙종 6)에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죄가 풀려 호군에 서용(敍用)되었으나, 숙종 초부터 사이가 벌어진 송시열과 그 계통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유현(儒賢)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채 호를 ‘초려’라 하고 초막을 짓고 지내다 죽었다. 사후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 『초려집(草廬集)』 26권이 전한다.
[변천]
초려정은 1657년(효종 8)에 벼슬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이거한 후 후진 양성에 여생을 보낸 초려 이유태가 구량천 변에 지은 정자이다. 조선 숙종 때 문인으로 송시열·송준길·윤선거(尹宣擧)·유계(兪棨) 등과 더불어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김집 부자에게 학문을 익혀 호서 산림 오현(五賢)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던 초려 이유태가 유배에서 풀린 뒤 머물며 지냈다.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유지되어 왔으나 1967년에 구량천이 범람하는 수해로 무너졌다.
[위치]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장기리 중산 마을에 있는 주차장에서 북쪽으로 구량천교를 지난 450여 m 지점의 구량천 변에 자리한다. 지금은 초려정이 있던 자리에 유적비와 시멘트로 지어진 ‘무궁정(無窮亭)’이라는 팔각정이 세워져 있다.
[의의와 평가]
초려정은 사계 김장생·김집 부자에게 학문을 익힌 초려 이유태가 유배에서 풀린 뒤 머물며 지낸 곳에 있던 정자로, 현존하지 않은 점은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