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7007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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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鳳仁 |
영어공식명칭 | Han Bong-in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남도 밀양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선미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 한봉인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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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19년 이전 - 한봉인 신흥중학교 수학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5월 - 한봉인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11월 10일 - 한봉인 의열단 조직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2월 27일 - 한봉인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 지원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10월 - 한봉인 경북의열단사건 |
활동 시기/일시 | 1926년 12월 28일 - 한봉인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선고 |
몰년 시기/일시 | 1968년 - 한봉인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80년 - 한봉인 건국포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한봉인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
출생지 | 가곡동 - 경상남도 밀양시 가곡동 |
거주|이주지 | 마산리 -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 |
학교|수학지 | 신흥중학교 - 중국 지린성 퉁화현 |
활동지 | 밀양 - 경상남도 밀양시 |
활동지 | 호림 - 중국 지린성 |
활동지 | 밀양경찰서 - 경상남도 밀양시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대표 경력 |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한봉인(韓鳳仁)[1898~1968]은 1898년 경상남도 밀양시 가곡동에서 태어났다. 만주에서 수학하고 의열단을 조직하여 활약하였으며, 경북의열단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한봉인은 김원봉과 동갑내기이며, 1916년 김원봉이 중국으로 떠날 때 자금을 마련하여 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기승을 부리자, 한봉인은 중국으로 가서 김원봉을 만나 의기투합하고, 당시 지린성 유허현[柳河縣]에서 퉁화현(通化縣)으로 이전한 신흥중학교[신흥무관학교로 개칭]에 입교하여 수학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들불처럼 퍼져 나가자, 한봉인은 독립운동을 펼칠 때가 왔다고 기뻐하였고, 김원봉은 독립운동 자금 모집의 적기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1919년 5월 한봉인은 김원봉의 지시에 따라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하여 국내로 들어왔다. 한봉인은 대구부 칠곡군 임천면 신동의 이명근에게 김원봉의 뜻을 전하고 수천 원의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명근이 거절하면서 자금 모집에 실패하고, 한봉인은 중국으로 돌아갔다.
1919년 11월 10일 한봉인은 길림의 호림(虎林)에서,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서상락, 권준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1920년 한봉인은 의열 활동을 위하여 국내로 들어왔다. 1920년 11월 한봉인은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마산리 자택에서 배중세, 김상옥, 고인덕 등과 함께 비밀리에 폭탄 2개를 제조하였다. 이 폭탄을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으로 하여금 밀양경찰서에 던지게 하였으니, 바로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이다. 밀양경찰서 폭탄투척의거로 최수봉은 사형을 선고받고 교수형을 당하였지만, 한봉인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여 항일투쟁을 이어 갔다.
1925년 10월 한봉인은 이종암, 배중세, 고인덕, 김재수, 이병태, 이병호, 김병환, 신철휴, 이기양, 이주현과 함께 또 한 차례의 의열 투쟁을 진행하였다. 1만 원의 의열단 활동 자금을 모집하고, 폭탄 의거를 감행하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1925년 11월 5일 이종암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모두 검거되고 말았다. 경북의열단사건으로, 한봉인은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폭발물취체벌칙 위반과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 혐의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한봉인은 1968년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한봉인은 1980년 건국포장과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