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1004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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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王山竹槍義擧 |
영어공식명칭 | Daewangsan Jukchang Uigeo |
이칭/별칭 | 경산 결심대의 강제동원 거부투쟁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경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4년 7월 25일 - 대왕산 죽창의거 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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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944년 8월 13일 - 대왕산 죽창의거 종결 |
발생|시작 장소 | 대왕산 죽창의거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흥정리 |
종결 장소 | 대왕산 죽창의거 - 경상북도 경산시 남산면 흥정리 |
성격 | 항일운동 |
관련 인물/단체 | 결심대|안창률|김명돌 |
[정의]
1944년 경산 지역에서 일어난 일제의 강제징용 반대 투쟁.
[개설]
대왕산 죽창의거는 경산 지역의 농민 출신 청년들이 1944년 일제의 강제징용을 거부하며 일으킨 항일운동이다. 이른바 ‘경산 결심대(決心隊)의 강제동원 거부투쟁’으로 일컫기도 한다.
[역사적 배경]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확대되면서, 연합국과 일본의 대결 구도가 형성되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근로보국대와 지원병제란 미명 하에 값진 생명들을 전쟁소모품으로 내몰았다. 그런 가운데 일제에 대한 회의와 염증, 반항심과 적개심이 고조되었고, 강제징용의 대상이었던 학병과 청장년 층이 주축이 되어 직접적인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경과]
대왕산 죽창의거는 일제가 패망으로 치닫고 있던, 1944년 6월 경산 지역에서 일어난 징용 반대 투쟁이었다. 당시 징용 대상자로서 남산국민학교에 집결한 청년들 중 사월동의 박재달(朴在達)·성상룡(成相龍)·김인봉(金仁奉) 등이 주축이 되어 의거를 논의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15일경 산양·송내·남곡 등지의 대표자들까지 모두 29명이 합류하여 원당보(元塘湺)에서 최종적으로 준비모임을 가졌다.
이 모임에서 대표자들은 징용 반대 투쟁을 위해 결심대(決心隊)를 조직하고, 남산면 대왕산을 투쟁 장소로 결정하였다. 아울러 죽창과 철창으로 무장하고 장기 투쟁을 위한 식량과 취사도구를 준비하여, 각 부락별 입산 경로를 결정한 뒤 7월 25일에 입산하였다. 이들은 3개 소대, 1개 특공대, 1개 정보연락대로 편제하고, 특공대는 남산주재소를 공격하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당시 결심대의 편제는 대장 안창률(安昌律), 부대장 김명돌(金命乭), 제1소대장 성상룡(成相龍), 제2소대장 배상연(裵相淵), 제3소대장 최외문(崔外文), 특공대장 최기정(崔基貞), 정보연락대장 박재달(朴在達)과 기타 대원으로 구성되었었다.
1944년 7월 27일 부일조직(附日組織)인 경방단(慶防團) 단원들이 올라와 이들을 회유·협박하였고, 남산면과 자인면의 순사들도 올라와 협박·발포하였으나, 대원들은 투석전으로 맞섰다. 이에 일제는 비행기를 동원하여 정찰을 하는 한편, 가족들을 협박하기까지 하였다. 8월 1일에도 다시 일경과 전투가 벌이며 대왕산 일대에서 대치를 이어 나갔다.
[결과]
식량 공급을 담당했던 특공대와 정보연락대가 일경에 의해 발각되면서, 결심대는 커다란 난간에 봉착하였다. 굶주림에 지친 대원들은 결국 은밀히 하산하여 개별적으로 모처에 은신하던 중 8월 10일부터 13일 사이에 전원 피체되었다. 이후 일제의 고문으로 안창률과 김경하는 옥사하였고, 박재달과 박재천은 해방 한 달을 앞두고 병보석 되었다. 나머지는 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왕산 죽창의거는 1940년대 전시체제 하 경산 지역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징용·징병거부 투쟁으로 일제 강점기 말 마지막으로 발생한 직접적인 항일독립운동이다. 현재 대왕산 죽창의거 전적지는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으며, 1995년 5월 31일 남산면 사월리에 항일대왕산죽창의거공적비(抗日大王山竹槍義擧功績碑)가 건립되었다. 2015년 5월 29일부터는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